글 | 김선화
그분의 가르침은 분명 세상과는 반대였다. 난 줄곧 상위 그룹만을 고집하며 그게 공부의 목적인 듯 살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공자님의 ‘德’을 이루고 싶었다. 석선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내 손에 보이게 잡히는 것은 바로 ‘德’이었다.
그분과의 동행 27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어 긴 세월 이곳에서 보낸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내 지성을 가지고 선택한 이곳에서의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비록 가진 재물 하나 없지만, 더 추구하고 싶었던 학식도 명예도 없지만 내 마음만큼은 황후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내 마음은 늘 행복과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오십을 훌쩍 넘어 내 인생을 뒤돌아볼 때 가슴 뿌듯함을 만질 수 있다.
세상에는 나름대로 천지 만물이나 각종 동물,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신이라며 섬기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석선 선생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데 누가 질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분은 내게 절대적인 하나님이시다. 설사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실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이단 교주라 할지라도 내 선택과 내 삶의 방향에는 변함이 없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물이 되고, 발이 되고, 무아가 되고, 신선이 되는 삶…. 얼마나 멋진 교리인가!
석선 선생님과 중앙아시아에서 한마을에 잠깐 같이 살았다.
이상하지~ 그분과 같이 살면 살수록,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정말 매력 있으시니 말이다.
같이 살면서 보고 체험한 이야기를 하나씩 해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 지부에 오셨을 때는 한참 창기십자가의 고난 중에 계셨기에 고통이 매우 심하셨다.
창기십자가로 몸부림치시는 것을 멀찍이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겨울에는 석탄을 땠는데 온 동네의 시커먼 석탄 연기가 사택 쪽으로 몰려들어 사택에서 있으면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창기십자가로 인한 내 고통에 비하면 석탄 연기는 오히려 고소하다.”고 하셨다. 창기십자가로 고통하시는 것을 안 보려 애써 외면해도 보였다.
그렇게 흑암의 먹구름이 그분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항상 그분으로부터는 찬란한 태양 빛이 비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살뜰하게 챙겨주시고 늘 웃어주시고 일일이 사랑 주시고 넘치는 행복을 쏟아 부어 주셨다.
보통 인생들이라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과 질고가 극에 달했을 때 남을 돌아볼 수 있을까?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남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내가 믿고 따르는 존경하는 우리 석선 선생님!
그분은 한국에 계실 때보다 더 자상하시고 더 사랑이 충만하셨다.
아프고 병들어 고생하는 식구들을 날마다 찾아다니셨고, 주체성이 확립되지 않아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일일이 부르셔서 상담해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셨다.
일하는 부서 부서마다 찾아다니시며 격려해 주시고, 돈 때문에 궁색해하는 식구들에게는 돈을 주시고, 하물며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옷이며 신발까지 있는 대로 주시기에 분주하셨다.
참, 나도 받았지. 선생님 드시라고 누가 보내드렸던 산삼을 병약한 내게 주셨다. 또 잊지 못할 일 한 가지는, 머리 피부가 헐어서 비듬처럼 나와 있는 것을 어떻게 보셨는지, 선생님께서 쓰시던 절반 정도 남아있는 비듬 샴푸를 대뜸 건네주셨다. ㅋㅋ 너무 자상하지 않은가!
그분의 사랑은 그러셨다.
마치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아낌없이 주시고주시고, 또 주시면서도 부족하다시며 주시기만 하신 생애… 눈부시지 않는가 말이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은 꼭꼭 기도처를 다니셨다.
11월로 기억난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쳤다. 선생님께서는 심한 안질로 고생하셨다. 눈동자에 벌건 살코기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매우 따갑고 아프다고 하셨다.
바람맞으면 더 아프실 거 같아서 이런 날은 다니지 마시라고 했더니
“내가 여기 기도 하러 왔는데…. 내 백성들 생각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기도를 쉴 수가 없어. 쉰 적이 없어. 나는 늘 돌나라 한 사람 한 사람 위해 기도해….”라고 말씀하시며 마치 안 하면 큰일 나는 숙제를 하는 것처럼 그리 나가셨다.
‘내가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데 나 좀 안 봐 주는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너는 아느냐?’고 푸념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만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다.
엄마는 절에 다니셨다. 틈만 나면 절에 가셔서 우리 자식들 위해 기도한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교회에 다녔다. 그렇지만 엄마의 기도는 늘 가슴에 젖어왔다.
엄마는 늘 내가 잘되고 건강하길 기도하셨다는데 그 마음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고 그 마음만큼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고 여겼었다.
석선 선생님께서는 늘 나와 돌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실로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방석 하나만 새로운 거 깔아드려도 어색해하시고,
양칫물 떠 드려도 어색해하시는 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에는 아주 적극적이셨다.
사랑한다는 고백보다는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셨기에
내 인생을 다 바쳐 따른다 해도 후회가 없는 것이다.
거하셨던 방은 아주 작고 가구 하나 없는 빈방이었다.
그래서 목재 주니어 옷장과 작은 책상을 하나 사다 놓아 드렸다.
내 수중에 돈도 없었거니와 선생님의 성품을 잘 알기에 비싸고 좋은 것은 살 수가 없었다.
내가 가구 사러 나갔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돌아오니까 전화하셔서 역정 내셨다.
얼마 들었느냐고, 내가 그런 거 좋아할 줄 알았느냐고….
“너무너무 죄송해요. 정말 좋은 거 해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소박한 것을 사 와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작고 소박했다. 해 드리는 손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 돈이면 여기 식구들 한 달 생활비잖아. 이따가 혼날 줄 알아.”
그 나라 현지인이 선생님께 선물로 드렸던 말도 팔아 우리 생활비로 주셨고, 여러 형제들이 모아 한마음으로 사 드렸던 자가용도 팔아 우리 생활비로 주셨고, 누가 사드렸던 모터보트도 팔아 우리 생활비로 주셨다. 그분의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다.
들어오는 족족 내 보내시기 때문이었다.
걸어 다니기에는 영내가 너무 크고 넓었다. 나중에 어떤 형제가 자전거를 한 대 사드렸다. 좋아라 하시며 그 자전거를 타고 이 형제, 저 형제 방문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평소 보아온 생애를 알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어떤 고난의 잔을 마신다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창기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모든 거룩하고 순결하신 생애가 ‘창기 십자가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봉해진 계시 같은 일들이 다 풀어지는 날….
만일에 그분이 이웃집 평범한 한 인간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살다 늙어 죽는다 해도,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은 가히 명품 인생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Excellent choice!! perfect!!!!
석선 선생님을 만난 나, 선화의 행복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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