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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한국 생활

3.1절 그 날,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얇고 가는 초승달이 뜬 2월, 달빛 아래 모인 사람들 중 유난히 눈이 반짝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눈빛에 바람마저 잔잔해지는 듯 했고 그 잔잔함에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10년, 일제는 무자비한 무단통치라는 이름하에 사람들의 귀와 눈과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종교인으로 평생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그였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귀를 막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유심>>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그 잡지를 통해 오직 하나,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잡지를 만들면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희망을 향한 등불이라 믿었습니다. 1918년 12월 초, <<유심>> 2호를 내고 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빠르게 변화해 갔습니다. 바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 자결주의 때문이었죠.

“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은 받을 수 없다 ”

자주독립은 그에게 강한 염원 같은 것이었습니다.

 

 


<D-2> 1919년 2월 27일, 망설이는 사람들, 그의 열망과 부딪히다!

 

그는 이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그의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황실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외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3.1운동으로 수감된 그의 모습]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 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동지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는 <<유심>>을 만들면서 만난 최린을 은밀한 장소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소. 가만히 있기에 우리는 너무 늦었소. 우리가 일어납시다.”

 

최린은 그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 후 최린의 동기인 권동진과 오세창도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표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목숨은 하늘에 맡기고 앞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동지들은 자주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암살이 아니었습니다. 테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일은 혹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소. 우선 일본 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보도록 합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선 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운동입니다! 청원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3.1운동을 준비하는 33인]

 

처음 그의 계획에 동참하겠다던 200여 명의 동지들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과 지도급 인사들은 다 빠지고 결국 종교 운동가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 선생은 그를 적극 도왔습니다.

그런 손병희를 그는 자신의 앞에 세웠습니다. 마침내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된 33인이 마지막 꿈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소설가 최남선에게 평화적이고 온건하지만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필요하며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정신이 들어가도록 <독립선언서> 작성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과 문장이 온건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거기에 <공약삼장>을 덧붙여 최종안을 작성했습니다. 

 

 


<D-1> 1919년 2월 28일, 전국으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다!

 

그는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며 내일을 기다렸습니다. <독립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을 통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 사장 이종일에게 전달되었고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와 함께 2만 1,000매를 인쇄하여 경운동 자신의 집으로 운반하였습니다. 그 <독립선언서>는 드디어 오늘 전국 각지로 배포되었습니다. 드디어 내일!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유심>>을 만들면서 그를 수없이 괴롭혔던 일본의 협박, 동지의 배신... 그리고 전국에 뿌려진 독립선언서! 그는 또다시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혹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일제의 탄압이 더 심해져 민중들이 다시 한 번 고통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 걱정과 함께 새벽빛은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3월 1일, 그 날은 다가왔습니다.

 

[3.1운동 - 독립운동의 염원은 통했다!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

 

 


<D-day>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처음에 탑골 공원에서 열기로 했던 거행식은 인사동 한 요릿집인 태화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장소를 바꾼 이유는 군중 심리로 일제의 탄압이 폭력적으로 변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29명의 목표는 외교를 통한 독립이었습니다. 바뀐 장소에서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그에 의해 오후 2시 정각에 발표되었습니다.

 

[3.1운동 - 독립선언서]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삼창을 불렀습니다. 그는 태화관 주인을 불러 총감부에 전화를 걸게 했습니다. 그는 태화관으로 온 경찰들에게 조금도 반항하지 않은 채 경찰차에 올랐습니다. 군중은 그런 그를 향해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들을 보자, 눈가에 뜨거운 무언가가 맺혔습니다.

결국 그는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이로 인해 33명의 동지들은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그들을 향해 그는 똥통을 둘러엎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 취소하고 숨어버리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게 그는 침묵했습니다.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 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후략)


 

- 님의 침묵 중 -  

 


<D-day> 그 날(3.1절) 이후

 

이렇게 3월 1일 독립의 그 날만 염원하며 앞장섰던 그는 바로 만해 한용운! 그는 옥중에서도 3대원칙을 정해 투쟁을 했습니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라는 것!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며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사식을 받지 말라는 것!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은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 만해는 이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습니다.

 

[3.1절 - 왜 그는 자신의 나라 독립을 외치면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공판이 시작되었습니다. 33인을 한 사람씩 불러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가장 엘리트였던 최린 선생은 그럴 듯한 논리로 일본 무단정치 10년을 고발했습니다. 일본 정치의 잘못된 점을 낱낱이 고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 듯 했지만 다시 말하면 일본이 정치를 잘했다면 오늘의 독립운동 같은 것은 없어도 될 것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만해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가 내 나라를 찾자는 일에 일본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리요!!”하며 최린 선생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 외의 어떤 질문에도 그는 침묵했습니다.


“피고는 왜 말이 없는 거요?”


하루는 재판장이 묻자 그는,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 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나를 재판하려 드느냐!”

오히려 호통을 쳤습니다.  

그는 3년 유죄선고를 받은 후 옥중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할 장문의 독립 이유서를 써내려갔습니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목숨 바쳐 찾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인가를 주장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논리 정연해 일제 헌병들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는 독립을 1년 정도 남긴 1944년 6월 29일,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독립된 나라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습니다.

그런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