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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박정희편

[칼럼] 빳빳했던 사나이, 박정희

[칼럼] 빳빳했던 사나이, 박정희

 

 정인봉 변호사 (발행일: 2013/02/01 20:29:01)

[칼럼] 빳빳했던 사나이, 박정희
-SPn 서울포스트, 정인봉 변호사


프랑스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네 손이 밉더라.
네 고운 손이 밉더라.


 

이 시를 쓴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이렇게 물어보고 나면 이걸 박정희가 쓴 것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저 박정희는 보수골통의 상징이고 백성들을 수탈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정작 그 글은 바로 박정희가 썼던 것이다. 흔히 생각하면 그건 참여시인이라는 김남주 선생이나, 박노해씨가 썼던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미국에 대해서 인디언을 참혹하게 학살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잡아 가두었다고 하면서 미국을 비난하였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생각해 보아도 같은 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진보주의자들이 반미성향을 띄게 마련이므로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박정희 시대의 반정부 인사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하였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미국이 스스로 인권을 침해한 사실은 감추면서 북한의 인권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의 인권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박정희는 미국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종속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다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북한의 도발을 더욱 확실하게 억제하기 위하여 주한미군이 필요하고 특히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방비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을 뿐이다.

10·26으로 사망하기 전, 박정희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지미 카터를 격분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역하던 사람이 아슬아슬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장장 40분에 걸쳐서 세계정세와 동남아시아정세, 그리고 남북한의 상황에 대해서 장황할 정도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결론은 주한미군이 철수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후진국의 대통령에게서 지도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카터 대통령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던 것으로 전해 진다. 분노를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종북, 진보주의자들은 월남파병이 우리의 피를 팔아서 달러를 구걸하였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서 젊은이들을 용병으로 팔아먹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산화된 월남이 대한민국의 주요한 무역상대국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오래 전의 묵은 역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월남에 전투병을 파병한 것은 박정희 시대 초기의 중대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을 일으킨 후 5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는 이미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태와 미국이 월남에 군대를 파병하게 되리라는 것을 읽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월남에 파병할 병력이 모자라게 되고 결국 파병의 압력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읽고 있었다.

박정희가 처음 미국에 케네디를 만나서 던진 이야기는 불쑥 던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서운 복선을 깔고 있었다. 그는 케네디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6·25 때 미국국민과 군대가 우리를 도와준 일을 잊지 않고 있다. 50,000명이 넘는 군인이 우리를 위하여 사망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감사의 뜻을 표한 박정희는 덧붙여 말했다. “혹시 월남이나 다른 지역에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리는 언제든지 미국의 도움이 되겠다.” 이렇게 미리 복선을 깔았던 것이다.

이미 6·25 발발 6개월 전에 북한의 침략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박정희는 곧 월남전이 확대되고 미군이 개입하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파병하여 달라는 압력을 가해오리라는 것도 읽고 있었다. 만일 그 파병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으로서는 주한미군의 일부를 철수시켜 월남에 투입하리라는 것도 다 읽어내고 있었다. 박정희는 어차피 월남에 파병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앞서서 파병하겠다고 제의하고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이익을 받는 것이 훨씬 나은 길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흔히 파병으로 인해서 실제로 우리가 챙겼던 것은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다. 미국의 대등한 협력자로서 당당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고,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박정희를 길들이려고도 하였다. 3선 개헌을 하고 맞이한 1971년 4월의 그 대통령 선거. 박정희는 만만치 않은 상대 김대중과 격전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그 선거를 두 달 남짓 앞에 두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단행하였다. 어쩌면 그 미군철수는 미국이 박정희를 길들이려는 한 방법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때문에 미국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미국은 믿을 수 없는 우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국방할 수 없다면 이건 조국을 통째로 미국에 갖다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남북대화를 시작하고 핵무기의 개발에 착수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후진국의 지도자들은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다. 그 뿐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미국의 눈치만을 보면서 국민을 탄압하였다고 비난을 받는다. 또한 그들은 나라의 자존심을 팔아먹고 미국에 비굴한 자세를 보인다고 욕을 먹는다. 그러나 박정희는 최소한 그렇게 미국에 대해서 비굴하였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는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본 일이 없다. 오죽하면 그 때 근무하였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미국 구경 한 번도 못했다고 하지 않는가?

박정희는 상대가 일본이든 미국이든 가리지 않았다. 국가이익에 보탬이 되면 굽힐 줄도 알았지만, 국가적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면 버틸 줄도 알았다.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국가 안보가 걸린 문제라면 그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의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서 혁명을 하였고, 가난을 몰아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빳빳한 자존심이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깡다구와 오기가 있었다.

각자의 생각대로 박정희를 욕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흔히 알고 있는 대로 그저 막연하게 독재자로 욕하고 미국에 굴복하고 재벌에 휘둘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건 역사의 진실에 반하는 일이다. (출처: 애국애족포럼)

(정인봉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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