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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박정희편

自主국방 의지가 없는 국민들이 從北의 온상!

自主국방 의지가 없는 국민들이 從北의 온상!
종북좌파 세력의 대표인 문재인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자주국방을 잃은 국민들의 비참한 自畵像이다.

 

趙甲濟    

 

 

   위대한 민족지도자 이승만(李承晩)의 생애에 있어서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의 남침이 시작되자 서울과 시민, 그리고 군인들을 버리고 몰래 한강을 건넌 뒤 다리를 끊은 행위는 일대 오점(汚點)으로 남게 되었다.
  
   대통령은 국회까지도 버리고 감으로써 210명의 의원들 가운데 62명이 서울에 잔류하게 되었다. 이들 중 8명이 피살되고 27명이 납북되거나 실종되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이던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이 역사의 교훈에서 「서울사수(死守)」란 안보개념을 확립하는 한편으로 자주국방력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박정희는 여러 번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서울에 남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말을 했다. 1975년 4월29일 월남패망을 하루 앞둔 날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사수(死守) 서약」을 발표한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았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이다. 이 강산은 ···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서 지켜가도록 해야 할 소중한 우리의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져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박정희의 뇌리에는 국가지도부의 서울포기가 가져온 지옥도(地獄圖)가 찍혀 있었다. 그런 상황을 예상하여 막아보려고 애썼던 입장에 있었던 그로서는 뼈에 사무치는 경험이었다. 「한국전쟁사」 제1권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강인도교 폭파로 한수(漢水) 이북에서 싸우고 있던 장병들 가운데 4만4천 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7사단의 경우 (약 1만 명 가운데) 장병 5백 명과 기관총 4정만 도강(渡江)할 수 있었다. 1사단은 5천 명만 도강하고 각종 대포는 유기되었다. 제2, 3, 5사단 역시 흩어진 채 도강하였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이어서 「군작전을 신뢰하다가 피난길이 막히게 된 정부요원들과 시민들은 학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지 않으면 안되었고 미처 반출하지 못한 정부 재산은 적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의 국가지도부는 끝발 순서대로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27일 새벽 2시에, 신성모(申性模)국방장관은 오후 2시에,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참모장은 28일 새벽 2시에. 채병덕은 서울을 빠져나가기 전에 일선 전투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지도 않았다. 명령을 전투부대에 전달할 만한 통신체제도 유지하지 못했다.
  
   버려진 군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것은 부상자들이었다. 6월24일 현재 서울시내 육군병원에 입원중인 환자는 약 1300명이었다. 여기에다가 3일간의 전투에서 다친 3200명의 군인들은 서울대학 부속병원 등 민간병원에도 분산되었다.
  
   서울대학병원은 1개 소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서울대학병원에선 움직일 수 있는 전상자 80여 명이 한 장교의 지휘하에 뒷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남아 있던 전상자들은 인민군에 의하여 학살당했다(한국전쟁사 제1권).
  
   박정희는 신라통일 이후 처음으로 자주국방이란 문제의식을 가졌던 지도자였다. 신라통일 이후 약 1200여년간 우리 역대 왕조는 사대주의를 외교 국방정책으로 받드는 과정에서 안보는 중국에 맡기면 된다는 생각에 너무 오랫동안 젖었다.
  
   국가지도층의 의식속에서 자주국방이란 개념 자체가 실종되어 버렸다. 박정희는 북한 정권의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의 자주국방은 북한군에 1 대 1로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의 건설인 동시에 주한미군에 너무 의존하지 않는 군사력 건설이기도 했다. 對美(대미) 자주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주한미군으로 상징되는 對美의존이 불가피하게 국내 정치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부른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反美로 돈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면서도 미국에 너무 의존할 때 생기는 자주성의 상실과 한국인들의 무책임성을 걱정했던 것이다.
  
   한국의 우파는 지금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고 있으나 자주국방을 우파의 목표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자주국방은 우파의 필수적 도덕률이 되어야 한다. 북한을 압도하는 이만한 경제력이면 우리는 미국의 도움 없이 북한군과 맞설 수 있어야 하고 김정일의 핵개발에 우리 힘만으로써도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핵개발도 공론화되어야 한다. 경제력에 자주국방의 정신력만 더한다면 가능한 이야기이다. 악랄한 북한정권도 지금 자주국방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은 지금 비겁한 죄로 해서 악랄한 세력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권력투쟁의 세계에서는 비겁함이 악랄함보다 더 나쁜 것이 아닐까.
  
   자주국방 의지가 확립되면 종북좌파 문제도 저절로 해결된다. 종북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주국방 의식은 彼我(피아)구분을 명백히 하도록 만든다.
  
   인류 역사상 이 정도의 경제력 격차를 가진 나라가 외국군대의 주둔에 힘입어 경제규모가 수십분의 1도 안되는 집단을 상대로 쩔쩔 맨 사례가 있을까. 우파의 각성은 이런 무책임성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종북좌파 세력의 대표인 문재인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자주국방을 잃은 국민들의 비참한 自畵像(자화상)이다. 
     
  ▣ 자료출처: 조갑제닷컴/2012-11-2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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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正熙의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에 관한 명언

 

  아래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의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에 관련된 연설문 내용들중에서 기가 막힌 명언들을 임의로 뽑아보았습니다...이 연설문들을 한번 읽으면서 음미해보니, 현재 우리가 가진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의 정신이나 정책 등이 30여년 전보다 못하고, 또한 아직까지도 30여년 전, 朴대통령의 연설문 내용조차 지키지 못하고, 또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지난 30여년(1980~2010) 동안, 도대체 우리 대한민국 군대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라는 공격적인 질문과 비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게다가 엄청난 국방비를 투입하면서도 말입니다...실전에 약한 행정적인 모든 운영방식은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치명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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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군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장에서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자는 데 있다. 적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비단 병력의 수, 장비의 우열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승의 요체는 군의 정신 전력에 있다. 즉, 엄정한 군기, 왕성한 사기, 그리고 필승의 신념에 있다"
---「1974년 3월 29일, 제30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② "땅굴은 북괴가 남침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므로 이를 하나의 관광대상(=아마 김대중이 땅굴을 천연동굴로 치부한 것을 가리키는 듯함)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후방에서 구경오는 사람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반공교육의 실습장이 되도록 세심히 신경을 쓰라"
---1975년 5월 23일, 전방 시찰에 나선 박 대통령이 각급 지휘관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http://www.namgulsa.com/main/)


③ "우리가 지금 말하는 "자주국방"의 개념이라는 것은……외부의 지원없이 북한 공산 집단이 단독으로 공격해올 경우, 우리도 우방의 지원없이 우리 단독의 힘으로 1대1로 능히 이를 격퇴하고 막아낼 수 있는 정도의 국방력을 빨리 갖추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앞으로 우리가 4~5년 내에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주국방"에 관한 개념이다.……다른 일이 다 잘 되더라도, 안보면에서 조금이라도 소홀한 점이 있거나 또는 어떠한 차질이 생길 때에는 우리가 해놓은 백가지 시책이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갈 염려가 많다. 따라서 모든 시책에 앞서서, 우리는 "국가안보"를 보다 튼튼히 하는 데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겠다."
---「1976년 1월 15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부전선 남방한계선 시찰(68.05.30)
 


④ "정신 전력 면에 있어서, 우리는 북한 공산주의 군대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저들은 개인 우상숭배에 얽매여 입만 벌리면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고 원시종교의 주문을 외듯이 교조적이고도 획일적인 교육으로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국군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높은 긍지와 우리의 민족문화와 전통을 수호 발전시켜야 할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1976년 3월 27일, 제24기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⑤ "전력이란 군장비, 성능, 훈련도, 사기, 군수지원능력, 국민과 군의 유대, 국방에 대한 국민의 관심, 그 나라가 처한 국제 환경, 우방과의 유대 및 경제적 저력 등을 포괄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그들(=북한 공산 집단)을 앞지르는 단계에 왔다. 우리는 벌써부터 "자주국방" 태세 확립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여 노력해 왔는데, 앞으로 이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하루빨리 완결지어야 한다."
---「1977년 1월 28일, 국방부 연두 순시」에서   

⑥ "우리의 국방을 남에게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 땅과 우리의 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1977년 3월 29일, 제33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⑦ 멸사보국(滅私報國)의 희생정신으로 나라를 지키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은 곧 우리 해군의 전통이 되고 있다. 일찌기 임진왜란의 전화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장군은 "나는 나라와 더불어 죽을 각오로 이 땅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의로써 용전분투하여 기울어 가던 국운을 바로 잡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죽음을 각오하고 위기에 대처하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린다"는 충무공의 위대한 군인정신이자, 필승의 신념인 것이다.
---「1977년 4월 12일, 제31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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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나/군가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침략의 무리들이 노리는 조국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이으랴 남북으로 끊어진 겨레의 핏줄 이 땅과 이 바다 이 하늘을 위해 너와 내가 맞잡은 손 방패가 되고 너와 나의 충정 속에 조국은 산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힘차게 뻗어가는 조국 대한을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빛내랴 반 만년 이어온 유구한 역사 내 부모 내 형제 내 조국을 위해 너와 내가 부릅뜬 눈 망루가 되고 너와 나의 충정 속에 조국은 산다 후렴) 아아 피땀 흘려 싸워 지킨 그 을을 이어 전우여 굳게 서자 내 겨레를 위해 작사 : 김성용/작곡 김강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