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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인물 이순신편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

우리는 흔히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과거 경험을 답습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 환경을 만들어서 살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창의란 바로 새 환경을 만들려는 의견을 생각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개척은 그러한 의견을 새로운 방법과 발전적 태도로써 성취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필요로 하는 논밭이나, 도로나 무기 등 모든 것을 손을 대어 보다 편리하게, 보다 좋게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이 창조하는 정신이며 또 개척하는 정신이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그 국민의 창의와 개척의 정신이 발휘된 민족은 부흥과 약진을 거듭하였고, 창의와 개척의 정신이 박약하였을 때에는 국운이 기울고 급기야는 몰락의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구태의연한 자세로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입을 크게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란 중 온 국민이 적을 무찌르고 살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정신이 발휘됨으로써 잃어버릴 뻔했던 조국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경우 그 당시 아무런 국방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으나,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새 의견과 새 방법을 찾아서 군사들의 훈련을 비롯하여 무기를 정비하는 등 온갖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현재 여수 진남관에 보존되어 있는 석인만 보더라도 전선이나 배를 매어두는 돌마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적의 침범을 예견하여 거북함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함을 만들었는데, ···전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것이 해이해져서 아무런 의욕도 구상도 없이 무사안일만을 바라던 때에 거북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전선과 다른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수많은 자재와 인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비웃음과 의혹을 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을 이겨내고 거북함을 만들었으니, 그 정신이 바로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들이 침범하자 일부에서는 ‘그들이 육전에 약하니 상륙시켜서 무찌르면 된다.’는 무책임하고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을 때에도 이순신은
“···오늘날 적의 세력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긴 것은 모두 해전으로서 막아내지를 못하고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임진장초)고 하여 적을 상륙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혔다. 설사 상륙하였다 하더라도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마지막 승리를 하게 된다는 새 작전술을 구상했으며, 수륙으로 병진하는 일본 수군의 진출을 막고,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군의 기지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한산도를 수군진영으로 설정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갔던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은 근대적 전략 개념에도 적용되는 매우 탁월한 식견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수많은 해전을 치를 때마다 지형과 적세와 조석 등을 고려하여 언제나 새 전술을 구상하였기에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며, 승리한 후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새 방안을 창출하였다. 특히 한산도 진영에 있을 동안에는 적국의 동태와 그 추이를 지켜보면서 해전의 경험에서 얻은 문제점을 시정하여 발전시키고 전선과 병기 등을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군의 조총을 보고서는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순신은 철을 백방으로 수집하여 그 조총보다 위력이 강한 총통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새것을 보고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일본군의 조총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시우쇠[正鐵]를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되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정철 조총 5자루를 올려 보내오니 조정에서도 각 도와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모두 제작하도록 하여 ···서로 다투어 만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내용은 요즘의 포술장교의 분석보다 못하지 않는 뛰어난 분석능력이다. 그리고 모든 업무는 자신의 공적을 앞세우거나 수군만이 제작하여 공훈을 세워 보자는 것이 아니라 빨리 대량생산하여 적을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한산도 생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수군을 모집하는 일부터 군량 및 군복 준비, 전선 및 총통을 제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만 했으므로 우선 무질서한 상태에 있었던 수군의 모집방법을 시정케 하고,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아, 그것을 팔아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등 모든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갔으니, 이는 이순신의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에서 우러났던 것이다.

더욱이 전쟁이 벌어진 동안에 이순신 장군에게 조정에서는 이렇다 할 지원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면서도 “종이를 올려 보내라.” 하는 등 지시를 일방적으로 내렸는가 하면, 수군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전주에서 과거 시험장을 설치하니 해당자를 전주로 보내라.” 하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런 지시에 따라야 했지만, 적을 방어하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의견을 올려 한산도에서 과거시험을 보도록 했던 것이다. 즉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이 나라로부터 받아야 할 보상은 똑같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수군 가운데서 과거시험 해당자라 하여 보내게 되면 적의 침범을 막을 수 없으니, 시험관과 채점관을 한산도로 파견하여 시험을 보게 하여, 똑같이 기회를 부여하게 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산도 진중에서 시험을 보아 100명의 합격자를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의 자세는 부하를 위로하고,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조정에서 행하는 의례적인 행사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 새로운 제안을 하여야 한다는 개척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한창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각 도에서도 육상전을 염려하여 돌산도에 말을 길들이기 위한 목마장을 신설하여 그 곳에서 나온 말들을 육군에 분배하도록 건의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고 있는데, 다시 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을 받았지만, 지휘할 군사도 없고, 부릴 배도 없는 상황이었을 뿐 아니라, 모여든 군사가 있다 해도 그들의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투철한 사명감, 책임감 및 개척정신으로 어떻게 하면 12척으로 승리할지를 궁리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9월 15일 꿈에서도 묘책이 제시되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서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패한다.”고 적힌 일기에서 우리는 이순신이 밤낮으로 노심초사했음을 알 수 있다.

명량 즉 울돌목이라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이순신의 신념이 1597년 9월 16일의 ‘명량대첩’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왜적이 333척이라는 전선을 이끌고 서해로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서 31척을 우리의 적은 전선인 겨우 13척으로 무찌르고 나머지는 퇴주케 하였다. 이것은 이순신만이 해낼 수 있고 전략적ㆍ전술적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순신에게는 적의 세력도 세력이거니와 그보다도 닥쳐오는 겨울을 지낼 길이 더 막연했다. 그러한 때에도 이순신은 절망하지 않고 ‘해로 통행첩’ 즉 선박 운항증과 같은 새 제도를 구상하여 큰 배를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씩을 바치고, 증명서를 받아 가져가야만 바다를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순신의 <행장>에 따르면 10일도 안되어 1만여 섬의 군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순신이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수군을 재건하면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더욱이 이순신이 실시한 이 ‘해로 통행첩’이라는 제도는 군량을 모으기 위한 방법만이 아니라, 남해와 서해를 드나드는 적의 간첩선 따위를 봉쇄하여 색출하는 데에도 큰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나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작은 정의부터 실천했으며,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으로 일했다. 이순신의 그러한 정신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제반 여건이 구비된 상황에서 찾은 것도 아니었다. 이순신은 악조건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새 길을 스스로 찾아내었던 것이다.

실로 이순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은 나라를 위해 지혜와 용기와 신념으로써 새 것을 찾아내는 자세를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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