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나라’라는 개념은 국토와 국민과 주권의 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면 누구나 국토를 사랑하고, 국민 모두를 위한 참된 마음을 갖는 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상 나라를 사랑한 수많은 위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어느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한 분이며, 이는 <난중일기>와 <장계> 등에 넘쳐흐르고 있으며, 사사로운 편지글에서도 우국의 심정을 토로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말과 글로써만 나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말과 행동’이 한결같이 일치하고 있었다는 데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순신은 눈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안락을 저버리고 그 당시 천시되었던 무인이 되기로 결심하였으니, 이는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는 그 당시에 ‘국토’를 지켜야만 국민과 임금과 내 가족이 있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순신의 국토에 대한 의식은 임진왜란 때 쓰신 일기와 장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594 3월, 당항포의 적을 무찌르고 한산섬으로 향하던 중, 명나라 장수인 선유도사 담종인이 일본과 화친하는 일로 일본군이 머물고 있는 웅천에 이르러 3월 6일에 이순신에게 ‘일본군을 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 왔다.
“일본군이 싸움을 그치고 그들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니,···본 고장으로 돌아갈 것과 일본 진영에 가까이 오지 말라”
그때 이순신은 심한 열병으로 19일 간이나 움직이기조차 힘들었으나, 너무나 분하여 스스로 답문을 지어 보냈다.
“왜놈들이 거제ㆍ웅천ㆍ김해ㆍ동래 등지에 둔거하고 있는 바, 이것이 모두 우리의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말이며, 우리에게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하니 ‘제 고장이란’ 역시 어느 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혼란을 일으킬 자도 우리가 아니고 왜놈입니다.” 라고 강경한 항의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땅’ 이라고 말한 글이 바로 국토 사랑이며 나라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고장이란 어느 쪽을 가리키는 것인가!’ 라고 지적한 것은 곧 이순신의 자주사상에서 나온 주권국가로서 수군의 진영이 있는 여수나 한산섬만이 본 고장이 아니라, 일본군이 머물고 있는 부산, 웅천도 내 고장, 내 땅이며, 조선 천지가 모두 ‘우리 땅’임을 밝히고, 우리 국민과 사랑하는 부하를 없앤 왜적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국의 위세를 빙자하여 우리나라와 국민을 깔보려던 명나라 장수 담종인에게 조선의 장수로서의 주인의식을 보여준 의연한 자세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우리의 땅을 아끼고 지키려는 정신이 얼마나 투철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한산도 곳간 속에 따로 벼 500섬을 간직해 둔 것이 있었다. 군량 이외에 따로 마련해 두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었다.
“지금 임금이 의주에까지 피난을 가 계신다. 들으니 조정의 대신들은 일이 불행하게 되면, 강을 건너자고 한다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이 곡식을 배에다 싣고 서해로 거슬러 올라가 임금을 마중해 태우고, 죽음을 다해 적과 싸울 것이요, 설사 불행하게 될지라도 임금과 신하가 같이 안고, 내 국토 안에서 죽는 것이 옳다.”
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국토의식인가! 국토의식은 곧 주인의식이요, 주권행사이다. 내가 곧 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나라를 버리고 가지 못한다는 정신이다. 죽어도 내 국토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나와 국토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정신이다. 그 당시 조정 안에서는 두 가지의 논란이 벌어졌었다. 하나는 “사태가 위급해지면 강을 건너 명나라에 망명하자”는 것이요, 또 하나는 “내 국토 안에서 최후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처음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서 대신들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냐?” 하고 물었을 때, 이항복은 “이대로 의주까지 가셨다가, 불행해지면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 때 류성룡은 “안 됩니다. 임금의 수레가 우리의 땅을 한걸음만 떠나시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주장이 의주에 가서도 시끄러운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그것을 알고 있던 이순신은 “내 국토 안에서 최후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애국이란 내 국토를 사랑하는 것부터 애국의 시작인 것이다. 제 몸을 아껴서 국토를 떠난다고 하면, 그것은 벌써 나라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와 국토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임금과 신하가 같이 내 국토 안에서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차라리 죽음이 있을지언정 도피는 없다는 것이 충무공 정신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순신의 애국이 세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첫째는 애국이요, 둘째는 우국이요, 셋째는 구국이다. 이것을 쉽게 자신의 어머니에 비유를 하자면 어머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보통 경우에 하는 말로서, 어머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나 행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님이 무서운 병에 걸리면, 우리는 모든 즐거움과 웃음과 놀이 따위는 전폐하고, 밤낮으로 어머님을 위하여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머님의 병환을 낫게 하려고 약을 쓰는 온갖 일에 전심전력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라의 요청에 따라 몸과 힘을 바치는 것, 그것이 애국이다. 그러나 그 나라가 혼란 속에 들었을 때 우리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것이 우국이다. 그와 동시에 걱정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국이다.
이순신은 일생을 통해서 우국과 구국으로써 일관된 생활을 하신 분이다. 이순신의 사랑의 대상자인 조국이 임진왜란 같은 큰 고난 속에 빠졌을 때, 이순신은 기쁨과 즐거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었다. 자나 깨나 걱정 속에서 나날을 보냈으니 이순신이 지은 시와 글들이 모두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가물가물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 새들도 슬피 우노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이순신이 무엇 때문에 가슴을 아파했던가! 그것은 사랑의 대상인 조국이 환난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조국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순신 장군은 언제나 국민을 지극히 사랑하는 정신과 생활이 뒤따르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순신은 공인으로 출발한 32살 때부터 자신의 신분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국민에게 피해가 될 수 있는 일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 호령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의 공직자들이 권세를 앞세워 위엄을 중시하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국민과 함께, 국민의 호소나 애원을 풀어 주는 등 국민을 보호한다는 정신으로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살길을 잃고 있을 때 “어적보민(禦敵保民)하는 데 힘써야 한다.” 하여 적을 쳐부수는 일보다 오히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온 정성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당시 전장에서는 외형상의 전과를 중요시하여 적의 머리 한 급이라도 더 베어야 하는 풍조였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전이 끝날 때마다 상황을 보아 “적선 몇 척을 남겨 둔 채 물러나라.” 하면서 “뭍으로 오른 적군이 타고 도망칠 배가 없으면 그 화풀이로 우리 마을에 들어가서 우리 국민에게 큰 해를 입힐 것이다. 짐짓 배를 남겨 두어서 적군이 타고 도주할 수 있게 해야 한다.”(임진장초)라고 하였다. 이것은 싸움터에서 얻을 수 있는 양적인 전과나 영광보다 한 두 사람의 국민이라도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국민을 위한 사랑이며 또 사명이며 정신이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순신은 떠돌아다니는 피난민을 위로하기도 하고, 또 몰려온 피난민을 전선에 싣고 돌산도로 들여보내서 살게 하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국민들이 따라 다녔을 뿐 아니라, 이순신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되어 제각기 이순신이 원하는 일들을 돕기도 하고,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죄인으로 압송길에 올랐을 때는 남녀노소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이제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하면서 길을 메워 눈물을 짓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국민들이 이순신의 참뜻을 밝혀주는 감격적인 순간이라 할 것이다.
특히, 이순신이 옥문을 나와서 백의종군하다가 통제사로 재임명되자, 젊은 장정들이 울면서, “대감이 다시 오셨다. 이제 너희들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천천히 찾아오너라. 나는 먼저 대감을 따라간다.”고 하였다. 그만큼 이순신이 있는 곳이면 살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국민에 대한 사랑은 국토사랑과 함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의 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순국하기 직전, 노량바다에서였다. 진린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먹고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줄 겸 자기는 남해에 있는 적을 치러 가겠다고 제의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그곳에는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 포로가 되어 있는 곳이니 안 됩니다.”라고 말하자, 두 사람은 곧 의견이 대립되어 그 분위기는 어색했다. 진린으로서는 고니시에 대한 체면, 머리 한 급이라도 더 얻어야 하는 공명심 등에 급급하여 명나라 장수라는 말로 윽박지르며 위엄을 앞세워 자신의 칼을 어루만지면서,
“이 칼은 본국 황제가 내려 준 것이오.”
하고 이순신을 죽일 작정으로 위협하였다. 즉 그 칼로써 조선의 통제사 정도는 죽여도 무방하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어떤 위협이나 설령 목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군인으로서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 번 죽는 건 아깝지 아니하오. 나는 이 나라 장수요. 적을 버리고 내 동포를 죽게 할 수는 없소.”
하며, 이순신은 더 큰소리로 따지자, 마침내 진린은 기가 죽어 사과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평소에 있어서나 싸움터에 있어서나 나라와 겨레를 위한 마음만으로 살았다. 일기를 펼쳐보면, 농번기에는 적시에 비가 오는 것을 매우 반가워했고 비가 오지 않으면 걱정하는 구절이 적혀있다. 또 추운 날이면
“여러 배에 옷 없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 떠는 소리는 듣기 어려웠다.”(갑오년 일기1월 20일)는 글이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구절들이 수없이 보이고 있다. 이는 평소에 지녔던 마음의 발로라 할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군인으로서 또는 장수로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한 사람의 부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면, 온 국민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부하에 대한 사랑은 엄격한 군율에 따라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지킨 사랑이었다.
이순신의 ‘행장’이나, ‘일기’에 의하면, 장수로서 위엄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부하의 일신을 염려하고, 또 부하의 의견을 들어주고 하면서도 군율을 어긴 부하에게는 그 경중에 따라 곤장을 쳤는가 하면, 법에 따라 칼로 목을 베기도 했었다. 반면에 부하에 대한 상훈은 그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바르게 포상하여 다 같이 기쁨을 찾게 하였다. 특히 전사한 부하에 대하여는 구휼법에 따라 각별히 그 시체를 고향에까지 옮겨 묻게 하여 그 의로운 혼령이 후세에 길이 전수되기를 바라면서,
“그대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고 하는 내용의 제문을 지어 부하들의 넋을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부하에 대한 사랑은 엄하면서도 유화한 인간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1592년에 일본에 의해 조선의 강토가 한 달도 되지 못하는 사이에 유린된 상황에서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시로 나라를 걱정하는 심정을 읊었다.
임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은 북쪽에서 위태로운데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들아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도 아네 왜적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이 한 몸 이제 죽는다 마다하리오?
이 시에서 이순신은 그 당시의 전황에 대하여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을 가지고 한 목숨 바쳐 이 강토를 짓밟고 있는 왜적을 모조리 무찌르기를 소원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의 우국충정은 다음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에 들어 활과 칼을 비추네.
이순신의 이 시에 대하여 이은상 씨는 문학가요, 시인으로서 평가하기를,“이 시야말로 충무공이 옛 시를 가져다가 자기 심정을 살리고 자기 심정을 읊어 뒷사람을 울린 것이라 할만하다. 과연 이 시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은 영웅시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인 동시에 그의 나라를 근심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작품이다.”라고까지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은 항상 한 목숨 바쳐 이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한없는 충정을 가지고 구국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다음은 해전을 수행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대목을 보자.
“한창 전투를 하고 난 이튿날에 또 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가득 차 있는데, 만약 그들이 돌아가는 길을 차단한다면, 모두 궁지에 빠진 도적들이 최후 발악을 할 염려가 되므로 하는 수 없이 수군과 육군이 함께 진격한다면 바라는 대로 섬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1592년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은 삼도의 수군을 지휘하여 왜적선 470여 척과 싸워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머지 왜적을 다 부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왜적들이 육지에서 나오지 않고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부산성 밖에 사는 왜적들이 육지에서 나오지 않고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부산성 밖에 사는 백성들이 왜적들에게 공격을 받을까 걱정이 되어, 공격만이 최선이 아님을 알고, 오히려 왜적이 도망갈 틈을 내어줌으로써 우리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봉황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순신 장군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국토와 국민을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한 애국이나 우국이나 구국이 아니라, 명확한 국가관 아래 작은 일부터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