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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인물 이순신편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

우리들이 말하는 책임이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생활이나 단체 생활을 원활히 해내기 위하여 그 구성원으로서 그 직책에 따라 누구나 해야 할 책임이 있고 책임질 일이 있다. 또 책임의 부담은 남에게 전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구성원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에 대하여 법률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

어떤 조직이든 책임을 완수하지 않으면 그 조직 전체의 책임을 그르칠 수도 있다. 때문에 일반인과 달리 군인은 지휘관에서 병사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책임에 생명을 걸고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책임을 완수하려고 노력한 많은 선현들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순신은 공직생활을 시작하는 그 날부터 순국하는 순간까지 자기 소임, 즉 책임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최선을 다한 분이다.
이순신은 32살에 무과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곳이 함경도 동구비보였다. 그곳은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는 험준한 산골로서 그 당시 무사들은 어느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최일선 경비대로서 위험할 뿐 아니라, 진이 허술하고 또 알아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아무런 불평 없이 부임하여 자기의 맡은 일의 내용과 성격 등을 먼저 파악하고 추진해 나갔다. 그 당시는 변방이 허술하였을 뿐 아니라, 부임한 관리들이 한성으로 거리가 멀다하여 적당히 소일하면서 임기 만료만을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얼버무리는 일(적당)’이란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또 윗사람의 지시나 순찰이 두려워서 눈가림이나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순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는 먼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찾아내어 스스로 열과 성의를 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먼저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방책부터 하나하나 정돈하면서 자신의 무술을 닦았다. 이러한 이순신의 모습에 대하여는 그 당시 이후백이라는 사람이 함경감사가 되어 변방의 작은 진을 순시할 때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서 매를 맞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동구비보에 이르러서는 “그대 말이 옳다. 난들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매질을 하랴.”하면서 오히려 이순신을 칭찬하였다는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순신의 <행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동구비보에서뿐 아니라, 훈련원 봉사라는 직책을 거쳐 윗사람의 미움을 받아 여러 곳으로 근무 장소가 바뀌어도 가는 곳마다 맡은 일에 대한 투철한 책임감과 적극적인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있을 때는 좌수사 이용이 자기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다며 미워하여 벌을 주려고 했으나, 뒷날 남병사로 재직시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오히려 이순신을 군관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또 이순신이 45살 때는 잠시 휴직 중에 있었는데, 전라 순찰사 이광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알고 “그대와 같은 영재를 지니고 이렇게 펴지 못하고 지내는 것은 참으로 가엾다.”하면서 조정에 건의하여 군관으로 임용하였다가 다시 조방장으로 겸직하게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북변에 위치한 건원보 권관으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와서 휴직하고 있을 적에도 조정에서 변방의 장수를 물색하던 중 이순신에게 탈상 날이 언제냐고 두 번 세 번 문의해 왔다. 이는 어느 곳에서도 누가 보지 않던 간에 소임을 다했던 이순신의 정신에 기인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해결하였을 뿐, 결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떠넘기거나,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웅포 앞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군을 지휘하여 적선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중, 군사들이 방심하여 통선 1척이 전복되자, 곧 조정에 장계하였다.

“신이 중책을 지고… 티끌만한 공로나마 나라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통선1척을 전복시켜 많은 사망자가 생기게 되었으니 이는 신의 용병술이 좋지 못하고 지휘를 잘못한 때문이므로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

이 말은 지휘관으로서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았을지라도 부하가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사소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직무를 잘못 수행한 것이라면 책임을 통감함과 아울러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지 않고 벌을 달게 받겠다는 의연한 자세를 보인 것이다.

이순신은 또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당할 때도 자신이 ‘출전하지 않았던 사유’만을 말하였으며, 자기의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기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 중에는 ‘희생과 죽음’을 각오한 큰 가치가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없다. 임진년 일본군이 침범하였을 때, 전라좌수영의 여러 장령들이 ‘맡은 지역’을 지키면 된다며 경상도까지 출전하는 것은 ‘전라도의 책임이 아니다’ 하여 신중론을 펴자 이순신은,
“적세가 마구 뻗쳐 나라가 위급한 이 때 어찌 둘러 앉아 맡은 지역만 지키고 있을 것이냐? ···우리의 할 일은 나아가 싸우다가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여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책임의 한계만을 논하기 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견딜 것이며, 죽음까지 불사한다는 투철한 정신을 보였던 것이다.

특히 백의종군 중 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어 겨우 12척의 전선을 수습하게 되자, 수군의 세력이 미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수군을 없애고 육전에 임하라." 하는 조정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바다를 지키는 수군의 장수로서 세력이 약하든, 강하든 간에 적을 무찔러 바다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의, 즉 수군이 맡은 책임을 적과 부딪쳐 반드시 굴복시키겠다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기에 이순신은 조정의 수군폐지론에 강력히 반대했다.

“저 임진년 5 ? 6년 동안에 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침범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제 신에게 전선 12척이 있는 바,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장계하여 수군을 유지하였으니, 이러한 이순신의 전략적 식견에 바탕을 둔, 나라를 위한 책임감, 의무감이 여러 해전에서 승리하게 했고, 나아가서는 바다를 지킴으로써 조국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확실히 자기 직분에 따른 책무를 완수한다는 ‘굳은 신념’을 간직한 분이었다. 이순신의 <초서일기>를 보면 백의종군하면서 다시 임명을 받게 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송나라 역사를 읽고”라는 독후감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힌 일이 있다. 그 글은 옛날 중국의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았을 때 송나라 재상 이강이 온갖 모략에 못 이겨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고 ‘도피해 버리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다.

“이강은 왜 가려고만 하는가. 가면 또 어느 곳으로 가려는가!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도피한다는 말은 참으로 마음에 생각도 못 낼 말이어늘,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을 것인가!” 하여, 나라가 어려움을 당한 때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피하려는 생각만 품고 있었던 것을 크게 꾸짖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순신 자신이 그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라고 명확히 밝힌 데 있다.

“나라를 침범하는 적과는 피로서 항쟁할 것을 주장할 것이요. 그렇게 안 된다면 단연코 죽음을 택할 것이요. 또,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화친하는 정책 속에 몸을 던져 구국의 실마리를 열어 볼 것이다. 그것 말고는 신하된 자로서 제 나라를 버리고는 갈 곳이 없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책임 있는 자, 또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자는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도피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기 속에서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이러한 충무공의 책임완수 정신은 해전을 수행할 적에도 나타났는데, 1598년 11월19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군사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유언을 남김으로써 끝까지 자기의 책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실로 충무공이 보여준 책임완수 정신은 마지막 운명하는 순간까지 소임 완수를 위해 맡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적극적인 자세로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