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부 분석관이 본 박정희대통령 | |
2012-01-30 | 김은성(전 국정원 차장) |
‘대통령병’에 걸린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초인적 애국심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이란 부서는 국내정보에 대한 기획, 분석, 판단을 담당했다. 판단기획국은 대통령에게 보고할 보고서 작성, 지시에 대한 복명(復命)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이 부서의 실무자들은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항이나 업무 추진 방향을 그때 그때 알 수 있었고 대통령의 마음가짐과 통치 스타일도 파악할 수 있었다. 금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 대통령 재임시 10년 가까이 분석관이란 직책을 통하여 바라보고 느낀 박정희 대통령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몇 가지 특징적인 사례를 간추려 보았다. 특히 ‘중도(中道)’, ‘실리’라는 현실 안주를 선택한 이명박 대통령과 이념투쟁에 휩쓸려 좌고우면하는 박근혜씨, ‘대통령병’에 걸린 여러 정치인들이 박 대통령의 애국심과 초인적(超人的)인 면모를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안보와 경제발전에 모든 정보역량 집중 ◀중앙정보부 초도순시. 1966년 1월 11일 중앙정보부에 도착한 박 대통령이 간부 요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국가기록원 박 대통령 당시 국내 정보 파트에서 벌이는 업무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에 집중되었다. 정보활용에 탁월한 솜씨 보여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정보는 국내분야만도 하루 평균 5~6건, 약 40페이지 내외가 됐다. 당시는 깨알 같은 활자로 식자(植字)를 했으므로 따져보면 엄청난 분량이었던 셈이다. ◀박 대통령이 1966년 경북지역의 황폐한 산지를 보고 양택식 경북지사에게 사방사업을 지시한 친필 서한. ⓒ 국가기록원 박 대통령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고 의문스런 부분은 밑줄을 긋고 깨알 같은 글씨로 “재확인”, “구체적으로 다시 보고할 것”, “나는 ~한 의견인데 참고 바람” 등의 의견을 달았다. 그러면서 날짜와 함께 ‘熙’라는 사인을 했다. 뿐만 아니라 관계 부처가 알아야 하거나 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부, ○○청에 통보할 것”, “○○부처와 협의토록 할 것” 등으로 보고서에 지시를 부기(附記)한 후 복사분을 내려보냈다. 마음에 드는 보고에 대하여는 “무척 고생했음”, “잘된 보고” 라고 명시해 보고서 작성관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어떤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러이러한 보고가 있었다”며 당사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거나 참고하라면서 아예 보고서를 그대로 넘겨주기도 했었다. 넘겨받은 쪽은 보고자에게 항의를 했으며, 이로 인해 소위 실세(實勢)들에 관한 보고서는 작성을 기피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박 대통령이 “농업을 망쳤다”는 데 동의할 수 없어 박 대통령은 어린 학생들부터 국산품을 사랑해야 한다며 국산 연필을 수집토록 해 직접 깎아 보고 문제점을 개선토록 하였다. ◀1979년 4월 30일 청와대 본관 대접견실에 불량 학용품 13종 2백여점이 전시됐다. 박 대통령은 약 1시간 동안 살펴본 뒤 메이커 및 규격 표시, 품질관리, 영세업체 금융지원 등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연필을 직접 깎아 보는 모습. ⓒ 국가기록원 당시 가장 열악했던 교사 처우도 획기적으로 개선했으며 모든 교육이 학교가 중심이 되도록 과외금지를 철저히 준수했다. 합의적 의사 결정 과정을 중시 ‘옐로페이퍼’ 제도 사회지도층 기강 잡아 ◀정부는 가정의례의 허례허식을 일소하고 의식절차의 합리화를 통해 건전한 사회기풍을 조성하고자 1969년 ‘가정의례준칙’을 마련하였다. 사진은 식생활 개선 무료 조리강습회를 겸한 가정의례준칙 계몽 강연회. ⓒ 국가기록원 지도층의 호화생활이나 고급승용차 소유, 심지어 양담배 흡연까지도 엄격히 단속했다. 대상자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하여는 문제내용을 적시하고 국민 앞에 솔선수범할 것을 권고하는 경고문을 정보부를 통해 발송, 당사자가 직접 수령토록 했다. 일례로 휴가철에 제주행 여객기 좌석 구하기가 어려울 때, 모 재벌급 인사가 여객기를 전세 내어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에 피서를 간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경고장(당시 ‘옐로페이퍼’라고 함)을 보내 기업인으로서 바른 생활자세를 가지라고 꾸짖었다. 인간적 실수에는 관대해 박 대통령은 반(反)안보적ㆍ반사회적 행위가 아닌 한 개인의 책임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절대 반대했다. 만약 야권 지도층의 사생활과 취약점에 관련한 정보가 정치에 이용되었다면 좀 더 편히 정국을 운영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현 가능성 여부에 중점둬 박 대통령 정권 초기 ‘굴욕외교’라는 엄청난 저항 속에서도 ‘대일청구권 문제’를 해결한 것과 키스트(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을 통한 인재 발굴ㆍ육성도 그 일환이었다. 국가 장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여론이나 인기에 무관하게 밀어부치는 성격이라 독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터 직접 물색하러 다녀 ◀서울대 종합캠퍼스가 들어선 관악산 기슭의 관악골프장. 정부는 1971년 4월 이곳에 건설 공사를 시작, 1975년부터 대학본부와 단과대학들이 이전함으로써 서울대 종합캠퍼스 조성사업을 매듭지었다. ⓒ 정부기록사진집 그는 서울대학교를 번듯하게 지어 선진국 대학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지시를 여러 번 했으며, 터를 잡기 위해 여러 곳을 물색하였다. 당시 일부에서는 서울대학생들이 데모를 하지 못하도록 구석에 몰아 넣는다고 오해해 서울대 통합이전 계획을 반대하기도 했으나, 박 대통령의 집념을 꺾을 순 없었다. 철저한 확인행정주의 박정희는 독재자인가? 가난에 찌든 국민들과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고속도로를 만든다든지 중화학공업정책을 시행한 것 등은 박 대통령의 미래지향적 사고와 추진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꿈 같은 소리”라는 비판 속에서도 1973년에 중화학공업기획단이 만들어지자 중앙정보부장실 등이 위치했던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19층을 비워주느라 밤새워 이사했던 기억이 난다. 지구상에 어느 독재국가가 야당이 그 난리를 치고 시가지는 연일 데모로 아수라장이 되는데 국가발전이 활발할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만 온전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한정된 자원, 정치 혼란, 안보 불안 등 모든 악조건 속에서 국가의 성장동력을 어떻게 이끌어 낼지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유산 중 이어 갈 것은 승계ㆍ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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