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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박정희편

哀 朴正熙 大統領 閣下 崩殂 34週忌 悼

 哀 朴正熙 大統領 閣下 崩 34週忌 悼

 

                                 누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였던가.

적어도 오늘날 大韓民國에서는 역사는 패자와 역적들의 기록이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인 1961 5,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희망이 없는 후진국들 중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나 차드같은 나라를 동정심과 멸시가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50년 전에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다는 점을 과연 꿈에서라도 상상이나 해 본 사람이 있을까?

  일제 말기부터 10년 넘도록 계속된 전쟁으로 국토는 잿더미가 되어있었고, 입을 옷이 없어서 버려진 미군 군복을 검정색으로 염색해서 입고, 매년 보릿고개만 되면 지금은 진열대에서 썩어가고 있는 그 보리도 못먹어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던 것이 우리 대한민국이었다. 거기다가 거리에선 매일 계속되는 데모와 그 속에 침투한 북괴 공비들의 선동질에 자칫하면 중공처럼 적화통일을 당할 위기의 연속이었다.

   국민들은 하늘만 쳐다보며 가난과 혼란을 숙명인 듯 체념한 채로 굶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그 1961 5 16일 새벽, 깊은 잠에 빠져있던 우리 민족을 거칠게 흔들어 깨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육군소장 박정희 였다. 길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피죽도 못먹고 굶어죽고 있는 데, 기름기 번지르르한 양반지주 출신의 정치인들은 당파싸움에 밤낮 가는 줄 모르는 당시 한국의 모습에 박정희 소장과 3천 혁명군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헌법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국가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건넜고, 그때부터 우리 민족은 잠에서 깨어나 거대한 세계사의 물줄기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하고, 국가 재정의 60% 이상을 미국에서 원조받던 한국이 경제개발을 시작하겠다고 나섰을 때, 세계의 시선은 냉담했다. 그토록 혈맹이라고 부르짖던 미국도, 해 질 날이 없다던 영국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극동의 반공국가에게 지원은 커녕 오히려 경제개발의 의지를 깍아내리려고 하였다. 이곳 저곳 굴욕의 구걸 아닌 구걸을 위해 부지런히 뛰던 한국정부에게 오로지 두 나라만이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제공해 주었다, 바로 유럽의 또 다른 분단국가 서독과 과거의 종주국 일본이었다. 혹자는 한일수교가 굴욕적 회담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장 길거리에 굶고 병들은 거지같은 사람들이 태반이던 나라가 무슨 힘이 있어서 당시 세계경제 3위의 대국 일본과 협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일본이 당시 일본 1년 재정에 맞먹는 6억 달러를 제공하도록 한 것은 굴욕회담이 아닌, 약소국 외교의 승리였다. 이렇게 힘들게 가져온 돈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각료들은 집무실에 야전침낭을 걸어놓은 체로 매일 밤 불철주야 경제개발과 국력배양을 위해 일하고 또 일하였다.

요즘 우리 한국인들은 가벼운 휴양지로서 필리핀에 많이 놀러간다. 필리핀에 가서는 더운 날씨와 덜 발달된 환경에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1960년대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의 부자 나라였다. 지금 세종로에 서 있는 문화관광부 건물, 미국대사관, 장충동 체육관이 필리핀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지은 건물들이다. 60년대, 한창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박대통령께서 아시아 반공국가들의 회의에 참석하고자 필리핀 마닐라에 갔었다. 그 곳에서 박대통령께서는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한국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멸시섞인 거부였을 뿐이었다. 생각해보자,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필리핀 대통령에게 그런 멸시와 조롱을 받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마르코스에게 갖은 외교적 무례를 당한 박대통령은 반드시 몇 년 내로 필리핀을 뛰어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들어서고 국민의식이 새마을운동으로 점차 개선되자 평생 굶어본 적 없던 지주출신 야당 국회의원들은 사사건건 정부의 일에 반대만 일삼기 시작했다. 고소도로 건설현장에 드러눕기도 하고, 일본과 미국의 기자들에게 한국대통령을 혼내주라고 하기도 하는 등 그들의 추행은 끝을 모르고 심해져만 갔다. 북괴의 김일성이 수령체제로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해 가고 있던 70년대에, 다시는 이 나라를 가난과 절망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집념에서 박 대통령 각하께서는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를 위해 유신 체제를 구축하였고, 그 결과 한국은 가일층 빠른 도약을 하게 된다.

월남과 휴전선에서 공산당과 싸우는 한편,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소득을 끌어올리고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21세기까지 한국이 먹고사는 기반을 마련하며 18년을 달려온 결과, 1961 82달러였던 국민소득은 1979 1636달러로, 1천만 달러는 고사하고 백만불도 되지 않던 수출액은 1979 150억불을 상회하게 되었다. 1961년 미군이 쓰다 버린 무기로 무장했던 국군은 1974년 자주국방의 기치를 걸고 실행된 율곡사업의 결과, 1978년 세계 7번째로 유도탄개발에 성공했고, 1979년에는 개인화기, 전함, 전차, 미사일, 98% 완성된 핵무기 도면을 갖춘 당시 세계 6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발전되었다.

 

미국의 카터가 우리의 안보를 가지고 장난을 쳐도, 일본의 실수로 조총련이 넘어와 흉탄에 아내를 잃었어도, 심지어 필리핀 따위의 대통령에게 멸시를 받았음에도, 박 대통령께서는 오로지 국력배양을 배양해 우리가 강대국이 되는 것으로 수모를 갚겠다는 신념으로 마지막 그 날까지 분골쇄신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혹자는 말한다, 당시 세계정세가 한국에게 유리했고, 또 경제개발은 국민들이 일을 해서 된 것이며 민주주의는 후퇴했다고. 그 사람들에게 한번 권해보고 싶다, 단 몇일 만이라도 벌레가 득실거리는 초가집에서 전기도 없이 추위에 떨며 하루에 보리밥 1그릇만 먹고 살아보라고. 국제정세가 유리했다고? 당장 가장 우방이라던 미국과 영국조차 공장지을 돈을 원조하지 않았던 게 당시 국제정세였다. 국민들의 손으로 이뤄낸 경제개발이라고? 국민이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일할 직장을 누가 만들어 주나. 그 부지런했던 60~70년대 북한 국민들이 김일성이란 지도자 밑에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어보라.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70년대 당시, 데모하는 국민 2만명을 탱크로 밀어버리던게 바로 옆나라 대만이었고, 1당 독재다 시피한게 일본이었고,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던 영국은 식민통치에 반대하던 북아일랜드 사람들을 몇십명 쏴 죽였고 인권의 천국이라던 미국은 흑인은 인간취급도 안하던게 그 당시 시대상이었다. 유신체제가 국민의 기본자유권 중 어느것을 침해했던가.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북괴와 중공의 인민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각하께서 서거하신지 34. 지금 각하의 염원대로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중진국을 넘어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각하께서 특별입사를 시켜줬던 가난한 청년이  이 대한민국을 이어받아 세계로 뻗쳐가게 했었다. 우리를 거지보듯 멸시하던 필리핀은 이제 오히려 일부 한국인들의 성매매 관광지로 전락했고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일본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제행사를 치뤄내기도 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승리인가. 전쟁으로 하는 복수보다 이 얼마나 진정한 승부인가.

   하지만 나라는 승리했어도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대중경제론이란 희한한 이론을 들고나와 국민들을 현혹시키던 김대중에 의해 북괴 정권은 수명을 연장받았고, 개인의 사욕을 위해 대기업을 해체시키고, 나라 안보를 넘긴 그 대역도당의 동상은 고향에 당당히 우뚝서 있음에도, 민족중흥의 지도자가 쓰러졌을 때 그 계승자들 중 누구도 그 업적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하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패기만만한 역동성은 그 뒤 정권들의 줄기찬 폄하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가슴속에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숨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다시 쓸 때이다. 더 이상 배반과 역적으로 얼룩진 오욕의 역사를 과감히 불태워 버리고 진정한 승리의 역사를 기록할 때이다.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중공이 팽창하고 일본이 부활할 때까지는 단지 몇 년 뿐. 그 사이에 우리는 각하께서 그러하셨듯이 위기를 기회삼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야만 한다. 그 첫 걸음으로 우리의 원동력이 되었고 앞으로도 추진체가 되어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박 대통령의 유지를 그의 관으로부터 되살려 내어서, 최근 침체에 빠져 기가 죽어있는 한국 사회의 맥박을 다시 한번 힘차게 뛰게끔 만들어 보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13년 10월 26일

박존모 운영자 유신부활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