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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도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앞에 엎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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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살아온 66년, 지난날 내 성격은 몹시 내성적이고 과민하면서도 정의에 불탔고 고집이 몹시 셌었다.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면서 소심했고 고루 어울리지도 못하고 꼭 가시 돋친 고슴도치 같았다. 혼자서 책이나 보고 클래식 음악이나 듣기를 좋아했다.
 
결혼 적령기가 넘어가고 집에서 걱정하시기에 당시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나는 음악에 매료되어 피아니스트와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다가 실패하고 내 삶은 더욱 외곬에 빠져 버렸다. 세상에서 완전히 내 자신을 소외시킨 채 내면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데로만 집착하게 돼 버린 것이다.
 
그 이후 진리를 찾는 정신적 갈망으로 더욱 많은 책을 섭렵하게 되었다.
숱하게 접한 책 중에는 지극히 몽상적인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고전이 유익을 주는 것 같았다.
헬다린의 [휘 페리온]에서 “최고의 것에서도 동하지 말고 최소의 것에서도 기쁨을 가지라.”, 데카르트의 [명증성] 즉 마음 문이 트여 미세하게 듣는 귀와 눈을 떠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물을 통찰하는 깊이에 이르는 사상과 니체의 [초인], 즉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고 영원으로 귀로, 귀향하는 과정 등 지극히 인간의 정신이 승화되어 가는 과정이 표현되어 있어서 순간적인 매혹을 느끼고 교훈을 받기도 한 것 같으나 글 자체로서만 머물렀을 뿐 내 자신의 개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년기를 지나면서부터는 불교에 심취되어, 불교의 행사와 의식에는 별로 매력이 없었지만 불교 서적은 많이 접하게 되었다.
불도인들의 책을 즐겨 읽고 [생명의 실상]이란 책에 푹 빠져 거의 다 통달했음에도 지적 만족감과 내면적 세계에 대한 예리한 해석과 분석은 제공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힘은 역시 제시되지 않았다. 반 무릎을 세우고 삼천 번 절하는 ‘아비라 기도’에도 두 번 참석하여 설법을 들어도 아무것도 해결 받지 못했다.
성불(成佛)은 무심의 경지, 즉 공(空)의 세계로 접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므로 그런 불교의 전 과정을 통해 지금쯤은 불교 신도 거의가 부처님을 닮은 품성이 이루어져야 하고, 나 또한 확신이 와야 할 텐데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없이 갈등만 가득하여 ‘아비라 기도’도 그만두고 주문 외우는 것도 중단했다.
 
다음에는 인도의 명상가들, 아무 노력 없이, 생각 없이 사물을 볼 수 있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 방법과 라즈니쉬, 마하리쉬에게 심취하면서 “아, 인도는 라즈니쉬가 있어서 참 좋겠다. 인도에 가서 라즈니쉬의 제자가 되면 좋으련만.” 하고 부러워했지만 역시 그곳에도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진리는 없었다. 아무리 지식의 바다 속을 헤매고 다녀도 순간적인 매혹은 끌고 교훈을 주는 것 같지만 글 자체로서만 머무를 뿐 영혼의 갈증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은 더욱 민감해졌고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져 갔다.
 
그러다 오십이 되었을 때에서야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바로 우연히 참석하게 된 石仙 선생님의 강의에서였다.
선생님의 강의 내용과 인품에서는 내가 책에서 소개 받았던 그 이상으로 참으로 거룩하신 소박함과 은근함이 계셨으며 지극히 성실함과 고상함이 넘치셨다. 예의와 겸손함이 겸비되셨으며 우아한 기품과 지혜는 헤아릴 길이 없었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달하신 자비로우심에 감복하게 되었다. 모든 재능은 빛났으며 진실로 풍부했다.
그분은 내가 지금까지 책에서 만나고 사모해 온 귀인과 성인들의 모든 고상한 품격과 지혜를 다 모은 듯한 분이셨고,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은 지금까지 책에서 부분적이고 피상적으로 전해 온 진리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어렴풋이 형상화했던 품성의 우아한 자태를 나는 이분 속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드디어 진리를 찾은 기쁨으로 뛰었고 화평과 평안함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도 이론도, 끝없이 펼쳐지는 사변도 아니었고 현실이었으며 50여 년을 소녀처럼 꿈꾸며 살아온 소망의 실현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했는지….
나는 이렇게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십 년 이상을 그분을 뵈면서 그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을 대하면 대할수록 더 존경이 가고 더 사랑이 가고, 가까울수록 더 어려워지는 그분은 나의 진정한 선생님이셨다.
오랫동안 내 마음에서 멀어져 있었던 엄마를 이젠 마음 다해 모시기로 했다. 늘 엄마의 가슴에 근심의 대상이었고 제일 속을 많이 썩여 드렸던 딸이기에 늦게나마 마음껏 효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정신세계 만족의 충전에만 급급했던 지난날 홀로 가슴앓이 하셨던 엄마에게 이제는 충일한 내면의 만족을 베풀 차례가 된 것이었다.
 
엄마는 85세 되시던 해 가을쯤, 치매의 초기 증세가 나타나더니 차츰 정신이 흐려지고 병이 깊어지셨다. 당신 신발과 식구들의 신발을 감추기도 하시고 옷장 안의 옷을 다 꺼내 방안 가득 흐트려 놓기도 하시고 한겨울에라도 잠을 주무시다가 잠이 안 오면 밖으로 나가자 하셨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와서는 또 나가자고 하시고, 그러다가 밤을 꼬박 새운 적도 많았다.
어떤 때는 몇 년 동안 사용하던 방 옆에 딸려 있는 화장실을 찾지 못해 방에 변을 보시고는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서 내가 오기 전에 치우시느라고 분주히 빨래에 싸고 계시기도 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 뭐 하세요?” 하면 “아이구, 네가 벌써 왔냐? 너 오기 전에 싸서 밖에 던지려고 했는데….” 하시며 미안해하셨다. 그래도 그것이 싫거나 불쾌한 마음이 없었다.
대변을 길에다 누어도 “어머니,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누셨어요. 어머니! 냄새도 어쩌면 이렇게 향긋하게 나네요.” 하고 크게 웃어 드리면 같이 따라 크게 웃으시며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럴 때 내 마음은 엄마가 얼마나 불쌍하고 측은한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럴수록 더욱 잘해 드려야지 다시 결심하곤 했다.
그런 일이 근 6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되면서 내 체력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정신 병원에 모시고 가서 도움을 받는 게 어떻겠냐는 주위의 권유도 받았다. 그렇지만 비록 내 몸이 약해서 간호하다 지쳐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날 낳으시고 키워 주신 엄마를 늙고 병들었다고 남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죽어서라도 엄마를 낫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분을 만난 이후 나의 모든 것은 달라져 있었다.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 그분께서 직접 보여 주신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치르신 사랑 때문에 겪는 희생, 이 모든 것들은 지친 나를 새로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특히나 부모 효도 말씀은 치매가 심하신 고령의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정성껏 모실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이제껏 그토록 채우기를 갈망하던 내면의 갈증은 실천적 삶을 통해 깨우친 것을 가르쳐 주시는 사랑의 도로 충만하게 해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을 가득 메운 사랑은 샘솟듯 안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있음을 느끼며 나 자신도 얼마나 놀라는지 모른다.
 
엄마는 91세의 연세로 잠드셨다.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머금으신 채로 내 품안에서…. 엄마를 내 품에서 보내 드릴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크신 선생님의 가슴속에 있는 인류를 향한 무아의 사랑을 내 안에서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바른길로 행복의 길로 달려가게 하는 것이 하늘이 내려 주신 참교육, 위대한 교육, 우주의 무극의 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글 _ 이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