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정율성, 세대·계층’을 뛰어넘어 “불후의 영웅”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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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을 빛낸 별 조선족’ 정율성(上) |
섭이, 셴싱하이와 함께 중국 현대음악가 반열
부친과 형제, 누이 모두 열혈독립운동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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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현대 음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정율성 선생 |
[일요주간=소정현 가자] ● '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
2009년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일인 ‘국경절’이었다. 매년 맞이하는 국경절이지만 그 의미가 남달랐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한 '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을 선정하여 후세에 기리도록 했다.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리다자이(李大釗), 작가 루쉰(魯迅), 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킨 장쉐량(張學良) 등과 어깨를 대등이 하면서 ‘신(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된 소수민족 출신 조선인이 포함돼 있으니 바로 그가 정율성이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첫 프로그램과 2000년 6.15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만남에 울려 퍼진 곡이 모두 정율성의 곡이었다는 사실은 ‘中-北’에서의 그의 위대한 음악적 위상을 명료하게 대변한다.
중국 국가(國歌)의 작곡가인 ‘의용군 행진곡’(義勇軍行進曲)의 섭이(攝伊), ‘황허(黃河) 대합창’을 작곡한 셴싱하이(詵星海)와 함께 중국 3대 현대 음악가로 중국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음악인 반열에 오른 정율성은 중국의 2백만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로서 중국 인구 80%인 10억 이상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1곡 이상 알고 있을 정도로 사자(死者)의 신분임에도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는 위대성을 견지하고 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개막 행사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정율성곡 팡파르
● 셋째형 따라 중국에서 항일투쟁 거점
중국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軍歌)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의 작곡가이자,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려온 ‘연안송’(延安頌) 등 360여 곡을 만든 인물인 정율성의 이름을 한국에서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항일독립투쟁, 국가건설, 문화혁명 등 격동의 중국 현대사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정율성은 1918년 8월 13일 광주시 양림동의 부친 정해업과 모친 최영은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률성의 원명은 부은(富恩)이였다.
정율성의 아버지 정해업은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 지조 있는 선비였다. 정해업은 장인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서법에도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민족적 절개와 지조로 가득 찬 애국자였다. 부친의 장인 최씨는 대한제국 말기에 소문난 양반계급이었고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정율성의 큰형 효룡(정남근)과 둘째형 충룡(정인제)은 3.1운동에 가담 한 후 일본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한 독립투사였다. 이후 큰형 효룡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국내에서 선전부 조직을 결성하다 검거됐고 1934년 옥사한다.
둘째형 인제는 중국에 남아 항일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에 전력을 다한 가운데 청년독립단 대표로 활동하면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가 사망했다. 바로 위의 셋째형 의인 또한 중국에서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학생 모집책임자로 활동했다.
정율성은 광주 숭일학교를 거쳐 전주(全州) 신흥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31년에 아버지를 여읜다.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경제적 곤란에 직면하여 학업을 멈춘 정율성은 1933년 중국으로 향한다. 동년 5월 13일 정율성은 목포에서 '평안환'배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의은과 함께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에 도착한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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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율성 선생 |
정율성은 약산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의 항일투쟁간부양성소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 입교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형 의은(義恩)을 따라 중국에 건너난 것이다.
정율성은 난징(南京)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고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한다. 정율성은 이곳에서 삼민주의와 조선역사도 배웠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청포도로 널리 알려진 이육사 시인도 다녔던 학교였다. 이후 정율성은 난징 전화국에서 정보를 캐내는 첩보요원으로 활동한다. 정율성이 의열단 활동 시기에 교류했던 인사들은 김학철, 이원대, 윤공흠, 나청 등을 꼽을 수 있다.
1936년이 되자 정율성은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 등이 결성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한중 연합전선을 통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지향하던 공산주의 계열 단체였다. 정율성이 몸담았던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장제스 등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면,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중국공산당과 동지적 관계인 셈이었다.
정율성의 하나뿐인 누이 봉은의 남편 박건웅은 상해에서 김산,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충칭(中京)의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지낸 열혈투사였다.
● 기독교 색채 스쿨에서 ‘음악재능 키워’
정율성은 光州숭일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흥미와 재주를 보였는데, 1930년 12세에 전주의 신흥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악보와 만돌린을 배운다. 정율성이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와 마을 앞 탈곡마당에서 ‘내고향’ ‘조각달’ ‘노임 받는 날’ ‘까투리 타령’ 등 노래와 춤을 가르칠 때면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정율성은 숭일학교를 다니면서 양림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정율성은 이 시기에 찬송가를 배우면서 근대 기독교 음악을 이해함으로써 음악적 재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가치관의 정립으로 항일 운동에 대한 신념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숭일, 수피아등 미국 남장로 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은 1930년~40년대 일제가 강요하였던 일본 국황 찬양 등에 저항하여 자진 폐교를 결정할 정도로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정율성은 숭일학교와 양림교회에서 익혔던 노래 중 다수를 중국에서 불렀거나 편집하였고 이는 중국 현지에서 녹음의 실체가 확인되고 있으니 숭일학교 시절의 학창생활이나 양림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그의 음악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익히 알 수 있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목사인 외삼촌을 좋아해서 그 집에 가서 놀곤했다. 외삼촌의 집에는 서양의 많은 명곡음반이 있었고 유성기(留聲機)가 설치되어 있어 즐거이 듣곤 했다. 이것이 어릴 때 정율성의 음악적인 소양을 길러준 것으로 보인다. 또 둘째 형이 선물한 만다린은 이후 정율성이 음악을 작곡하는데 둘도 없는 한평생 친구로 함께 한다. 그는 1933년 5월 중국 땅을 밟을 때조차 만다린과 세계명곡음반을 빠뜨리지 않았다.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정율성은 그곳에서 항일비밀활동에 종사하면서 어느 여교수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에 결정적 분수령을 이룬다. 정율성이 탁월한 대작곡가로 떠오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크리노와’(Krenowa) 여교수이다.
친구의 소개로 중국 상해에 체류하던 러시아 레닌그라드 교수 출신인 여성 음악가 ‘크리노와는 단번에 정율성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성악과 음악이론을 사사받던 정율성은 여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계속 공부하면 동방의 재원이 될 수 있다'는 격찬을 받을 정도로 빼어난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 그러나 정율성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족을 외면할 수 없다며 이를 애써 외면한다.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기 위해 1주일에 한 번씩 남경에서 상해까지의 먼 길을 오가며 음악적 재능을 불태웠던 정율성! 당시 2년 남짓 매주 교수에게서 받는 한 번의 수업료는 한 달 생활비와 맞먹었다. 이에 크리노와 교수는 정율성에게 무료로 수업을 받는 대신 매번 생화를 사오도록 했다. 그래서 정율성은 늘 꽃을 사들고 상해와 남경을 왕래했다.
정율성은 난징에서는 매일 여명의 새벽에 계명사(鷄鳴寺)에 가서 적막한 하늘을 향해 성악연습을 했다. 크리노와 교수는 정율성에게 상해에서 열리는 세계 명곡음악회에 출연할 것을 적극 권유하여 테너 선창을 맡으면서 관중들에게 큰 갈채를 받는다. 이때 닦은 성악 실력은 정율성이 옌안(延安)에서 음악가로 일대 도약하는데 큰 힘이 된다.
이때 정율성은 그의 이름을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힘찬 선율을 이뤄 봉사하리라 결심하고 이름을 정부은(鄭富恩)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바꾼다. 음악에서 성공한다는 뜻에서 음률 률(律)과 이룰 성(成)을 따 률성으로 고쳤다. 정율성이 당시 유명한 작곡가로서 ‘황허(黃河) 대합창’을 작곡한 셴싱하이(诜星海)를 만난 것도 음악 인생의 결정적 촉매제가 됐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율성의 음악 인생을 도운 사람은 다름 아닌 김원봉이다. 의열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은 정율성이 음악의 자질을 눈여겨본 터라 상해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도록 지원을 아끼질 않았다. 1936년 가을 김원봉은 정율성이 중국 ‘좌익 진보단체’와 접촉이 긴밀한 사실을 발견하고 후원을 중단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정율성은 더 이상 상해로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없었다. 정율성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정율성의 제부인 박건웅과 상해부녀구제회 지도자이자 ‘좌련’(左聯)의 여성회원인 두군혜(杜君慧)가 옌안으로 갈 것을 제의한다. 두군혜의 소개로 정율성은 상해의 팔로군 사무실에 가서 소개장을 받아 옌안으로 향한다.
이것은 정율성이 일생에서 분기점을 이루는 결정이었다. 이탈리아의 유학을 포기하고 옌안에 새둥지를 틀면서 정율성의 음악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1937년 10월 정율성은 시안(西安)의 팔로군 판사처(신원조회, 사전교육 장소)를 거쳐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인 옌안에 도착해서 산베이공쉐(陝北公學)에 입학을 한다. 팔로군 판사처에 보관된 해외전사(戰士) 명단엔 정율성이라는 이름이 베트남혁명의 아버지 호치민과 함께 기록돼 있다. 정율성은 졸업 직후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 들어가 음악과 항일운동의 본 궤도 진입에 박차를 가한다.
/일요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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