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존경하는 인물 이순신편

이순신 어록 2

與賊相對 勝敗決於呼吸 爲將者不之死 則不可臥
이제 적을 상대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사이에 걸렸다.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겠느냐.
1593년 3월 경 남해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공도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며 군무를 보니 아들이 휴양하기를 권하자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충무공은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태구련과 이무생에게 장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칼자루에 바로 위의 칼면에 이와 같은 도명을 한 칼에 한 구절씩 금상감으로 새겨 두었다.

將?功無補於涓埃口誦敎書面有?於軍旅.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론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595년 5월 29일 일기에서

獨依樓上 念國勢危如朝露 內無決策之棟樑 外無匡國之柱石 未 知宗社之終至如何 心思煩亂終日反側.
혼자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한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같은 인물이 없으니 사직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다.
1595년 7월 초1일 난중일기에서

若有心膽 則必自處矣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1595년 7월 7일 선조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내린 유지를 보고나서 참으로 놀랍고도 죄송함을 가눌 길이 없다면서

深夜使之歡躍非强爲樂也 欲使久若暢申勞苦之計也.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한 것은 억지로 즐겁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에게 그 수고를 풀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1596년 5월 5일 일기에서

所經一境 蓬藁滿 目慘不忍見 姑除戰船之整 以舒軍民之懸.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같이 폐허가 되어 그 참상한 꼴을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것이라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배겅들의 피로를 풀어 주어야 하겠다.
1596년 윤 8월 14일 일기에서

竭忠於國而罪已至 欲孝於親而親亦亡 天地安如吾之事乎 不如 早死也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에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은 어버이마저 돌아가셨다.
어찌하랴 ! 어찌하랴 !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어디 있으랴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1597년 4월 19일 백의종군하면서 아산에 이르러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듣고

晨昏戀慟淚凝成血 天胡漠漠不我燭兮 何不速我死也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은 아득한 저 하늘을 어찌하여 내 사정을 이다지도 살펴주지 못하는지, 왜 어서 죽지 않는지.
1597년 5월 6일 백의종군중 꿈에서 두 분 형님을 꿈에서 보고나서

介峴行來 奇巖千丈 江水委曲且深 路險棧危 若扼此險 則萬夫 難過矣.

개벼리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길이나 되고 굽이 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며 길은 험하고 위태롭다. 만일 이 험고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가 어렵겠다.
1597년 6월 4일 백의종군중 권율 장군의 진지를 찾아가던 곳으로 현재도 개벼리 개비리 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 臣不死 則賊不敢侮矣.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였다.8월 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12일 후 선조는 선전관 박천봉이를 시켜서 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육전하라”는 말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수군을 없앨 수는 없다며 올린 장계

昏鼻血流出升餘 夜座思淚 如何可言
어둘 무렵이 되어 코피를 한 되 남짓이나 흘렸다.밤에 앉아 생각하고 눈물 짓곤 하였다. 어찌 다 말하랴 !
1597년 10월 19일 일기중에서 한 달전 9월16일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칠천량 패전의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는데 10월 14일 막내 아들 면의 부고를 받았다. 그 부고를 받는 순간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을 앞세우고 꿈속에서 아들을 본 후 마음이 심란할 때 일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 謂矣.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
명량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7년 9월 15일 긴박했던 날 일기에서 이 말은 『오기병법(오기병법)』의 「치병편(치병편)」제3장에서 연유된 말이다.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된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은 진나라 左思가 지은 「촉도부(蜀都賦)」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大將不可不和 讐賊不可從遣
대장으로서 화친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원수를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1598년 7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7월 17일(우리나라에서는 8월 18일로 알았다) 죽으면서 철군을 명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비밀리에 철수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부대만 우리 수군이 바다를 가로 막고 있어서 못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뇌물을 바치고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명나라 진 도독은 그 청을 들어 줄려고 하였다.그 뒤 몇 차례의 뇌물을 먹은 진 도독은 결국 충무공께 왜적을 보내주자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진 도독은 부끄러이 여겼다.

此讐若除 死則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1598년 11월 18일 오후 6시경 왜장 고니시 유니나카가 이끈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 엄목포에서 정박하고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배들도 많았다. 충무공은 명나라 도독 진린과 약속하고서 이 날 밤 10시경에 같이 길을 떠나 19일 밤 2시경에 노량에 이르러 왜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충무공은 전선 약 150척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만 했고 이번을 최후의 전투로 장식해야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17일 밤 자정에 천지신명께 빌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勿令驚軍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않된다.
1598년 11월 19일(약력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나의 이야기 > 존경하는 인물 이순신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순신 어록 1  (0) 2013.02.18
이순신장군에 대한 세계적 평가  (0) 2013.02.16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평가  (0) 2013.02.14
이순신 어록  (0) 2013.02.12
백의종군  (0) 2013.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