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률
문화재란 일명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사전에는 “문화유산이란 문화활동에 의해 창조되여 그 가치가 높다고 인정되는 유형, 무형의 축적물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라고 기술되여 있다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영국에서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흥기하면서 천연자원의 개발이 활기를 띠는 사회환경속에서 자연의 파괴와 력사적문화유적의 훼손을 예방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발기된 문화보호운동에서 유래한것이다. 2003년 9월29일부터 10월 17일까지 유네스코는 프랑스 수도 빠리에서 제32차 회의를 거행, 바로 이 회의에서 “무형문화재보호공약”을 채택하였다. 이는 무형문화재를 보호하는 국제적인 중요한 공약으로서 각 성원국들이 상관 국내법을 제정하는데 국제법적인 의거를 제공하였다. “공약”은 30개 나라가 신청하여 가입하면 상기 공약이 효력을 발생한다고 규정하였다. 2006년 1월 20일, 로므니아가 제30번째 성원국으로 가입하면서 상기 공약 제34조에 근거하여 3개월후부터 정식으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2006년부터 매년 6월의 두번째 토요일을 “중국문화유산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치르고있다. 그리고 2011년 6월 1일 “중국무형문화재법”을 정식으로 제정하여 공포, 실시하고있다. 이런 문화유산은 물질문화유산과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나뉜다. 물질문화유산은 유형문화재라고도 부르는데 력사적가치와 예술적가치, 과학적가치를 가지고있는 문물을 가리킨다. 비물질문화유산은 무형문화재라고도 부르는데 여러가지 비물질형태로 존재하는 그런것, 다시말하면 인간의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여 대대손손 전해지는 전통문화의 표현형태들을 가리킨다. 례컨대 농사, 수렵, 의식주행, 관혼상제, 민속놀이, 민요, 민간무용, 민속공예 등이다.
연변에서는 다년간 무형문화재사업을 중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 주의 각 부문들에서는 전면적인 조사를 거쳐 민간음악, 민간무용, 민속, 민간미술 등 도합 9개 류형의 300가지 무형문화재종목을 수집했는데 그중 77가지 무형문화재가 성급무형문화재로, 16가지가 국가급무형문화재로 지정되였다.
중국조선족농악무는 2009년에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재 대표작으로 등재되였다. 심사를 거쳐 63명이 주급무형문화재종목의 대표적인 전승인으로, 40명이 성정부에 의해 성급종목의 대표적인 전승인으로, 2명이 문화부에서 명명한 국가급종목의 대표적인 전승인으로 선정되였다.
연변에서는 농악무양성쎈터 등 10개의 무형문화재전승기지를 건립하고 6개의 무형문화재전시장을 건설하였으며 왕청현 배초구진의 “상모춤고향” 등 14개의 특색이 있는 문화향진을 명명하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명절과 기념일, 경제무역행사, 관광 등 활동과 결부하여 무형문화특색전시, 풍채전시, 기능전시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조직하였다. 그중 퉁소문화절 등 대형행사는 우리 주의 문화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연변의 무형문화재보호성과를 집대성하여 출판한 《연변무형문화재화첩》은 88가지 주급이상 무형문화재종목을 수록하였는데 세인들이 연변의 전통문화를 료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있다.
하다면 중국조선족무형문화재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 민족의 락인이 또렷하게 찍힌 무형문화재 즉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이 력력한 우리 민족 특색의 무형문화재이다. 우리 민족이 960만평방킬로메터의 신주대지에 정착하면서 대대손손 대물림하여온 각양각색의 무형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넋이 고스란히 슴배여있다. 19세기 60년대 이후 우리 민족은 조선반도에서 괴나리보짐에 남부녀대하고 두만강 혹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이 땅에 정착하여 이 땅을 개척하며 대대손손 살아오면서 민족적애환이 그득히 슴배인 전통문화를 창조하였다.
우리 민족은 개척정신이 력력한 우리 특색의 무형문화를 만들어왔다. 연변지역은 우리 민족이 첫 괭이를 박으면서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과 함께 공동으로 개척한 땅이다.청나라가 200여년간에 달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하던 기간은 물론이고 봉금정책이 풀리던 초기 우리 민족은 “목이 잘리고” “ 3족이 멸한다”는 엄혹한 환경속에서도 변경민들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월강하여 화전농사를 지어왔다. 당시 화전농사를 짓는 방식이 여러가지였는데 그중 전형적인 방식이 바로 “일귀경장(밤에 가만히 강을 건너와서 땅을 뚜지고 씨앗을 심은후 새벽이면 돌아가는 방식)” 혹은 “춘경추귀(봄에 강을 건너와서 깊은 산속에 숨어 일년간 농사를 지은후 가을이면 타작하여 가지고 남몰래 건너가는 방식)”였다. 이러다가 붙잡히면 죽음을 면키 어려웠다. 당시 강을 건너간 남편을 외롭고 쓸쓸하게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아낙네들의 참상을 반영한 민요가 상당히 류행되였다. 그 민요의 제목이 바로 “기다림”이다.
새봄이 다 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님을
가을밤 안신까지 또 어찌 참으래요
두만강 눈얼음은 다 풀리여갔다는데
새봄이 아니오라 열세 봄 지났어도
못 참을 내 아이언만 가신 님 날 잊었을가
강남의 제비들은 제 집 찾아왔다는데…
우리 민족문화재는 반항, 항쟁의 락인이 또렷한 우리 특색의 무형문화재라고 할수 있다. 황량하고 메마른 불모지 이 땅에 정착하는 그날부터 처음에는 청나라의 잔혹한 탄압에, 그후에는 또 일본제국주의와 가렬처절한 항쟁을 벌리면서 항일구국투쟁,민족해방투쟁을 벌리였다. 이 와중에 수천수만의 애국지사들이 용솟음쳐나왔는바 그네들의 피와 생명이 바로 상기한 무형문화재들에 력력히 찍혀있다.
우리 민족문화재는 다문화특색이 력력한 무형문화재이다. 19세기 말엽 우리 조상들이 중국땅을 밟고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한족, 만족, 몽골족, 회족 등 여러 민족과 함께 생활하고 생산활동을 진행해오는 과정에서 서로 융합되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내용과 형식이 아주 풍부하고 다채롭게 되였다.
타방으로 중국조선족이 살고있는 그런 자연적환경, 사회적환경의 특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것이다. 인간은 그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되면 그 영향을 받게 되고 그 락인이 찍히게 된다. 우리는 흔이 이를 가리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한다. 중국조선족이 절대 대부분 집거한 구역인 연변지역을 포함하여 길림성과 흑룡강성, 료녕성은 기후가 춥고 황량한 미개척지로서 그런 기후환경, 자연조건에 의하여 기필코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왔던 그런 문화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나름대로 특색문화를 창출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 얘기다.
무형문화재는 중국조선족의 가장 보귀한 정신적재부이다. 오늘날 그 경제적가치, 물질적가치가 발굴되면서 중국조선족들에게 크낙한 부를 창조하는 중요한 산업으로 떠오르고있다. 지금 연길시에서 건설중에 있는 중군내 규모가 가장 큰 중국조선족민속원, 도문시 100년 민속전통부락, 이미 다채로게 펼쳐지고 세인을 깜짝 놀라게했던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기념행사 등이 이를 확인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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