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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건강과 식생활

몸에 좋은 장

과거 우리 조상은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각자 그 집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장을 담그고, 이를 이웃집과 나눠 먹으며 친분을 돈독하게 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급히 챙기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장이었다고 하니, 그들이 장을 얼마나 소중히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젠 집에서 장을 담그기 번거롭고, 또 장을 담은 항아리를 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장을 담가 먹는 사람이 드물어졌습니다. 대신 공장에서 만든 장들을 슈퍼에서 간편하게 사 먹게 되었지요. 김치나 물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사 먹는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던 식품들이 빼곡하게 슈퍼에 들어찬 모습은 시대가 변했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장을 만들지 않더라도, 여전히 전통의 맛을 전통 그대로 즐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장을 담그는 마을에 가 직접 구매하는 것이지요. 물론 인터넷 판매란 방법도 있긴 하지만, 기왕이면 직접 맛을 보며 고르는 재미를 오랜만에 느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모든 장은 메주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진 : 연합뉴스)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공장의 제품과 격을 달리하는 장을 만들어내는 두 마을을 소개합니다.

 

 

국내 장류의 종갓집, 순창 고추장 마을

 

“아무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순창고추장의 첫 CF는 거진 10년 전에 나왔지만, 여전히 많은 분이 기억하고 있는 명작입니다. 신당동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를 만들던 할머니에게 제작진이 ‘맛의 비밀’을 묻자, 자못 큰 비밀이라는 듯 나직하게 저 말을 말했더랬지요. 이 CF 덕분에 순창고추장은 화려하게 부활해 다시 사람들에게 1등 고추장으로 기억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순창 고추장의 역사는 매우 긴 편입니다. 1740년대에 역관 이표가 쓴 [수문사설]이란 요리책에는 순창 고추장의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순창의 명물이 고추장임을 짐작할 수 있고, 1800년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순창과 천안의 고추장이 유명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식사 습관이 점차 서구화되고,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순창의 장 만들기도 사양길로 접어드는 추세였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저 가정집에서 담근 후 아는 사람에게 선물해주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 우체국 택배 시스템이 정립되면서 순창고추장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당당히 ‘특산품’으로서의 장을 팔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를 본 대기업이 순창에 공장을 짓고 ‘순창 고추장’의 브랜드를 이용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요. 이런 대기업의 참가는 브랜드를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선 반가운 일이지만, 전통식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이들에겐 대량생산이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랜드가 같은 데다, 가격 면에서도 경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한데 모여 1997년 ‘순창 고추장 민속 마을’을 조성합니다. 이 마을에는 50여 가구 200여 명 가량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추장을 담고 있는데, 모든 재료를 순창 농가에서 공동구매하고 있어, 진정한 순창 고추장이라 부를 만합니다. 

 

<순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사진 : 한국관광공사)

 

서울에서 순창 고추장 민속 마을에 오시는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해 경부고속도로 (천안분기점)를 통해 논산•천안간고속도로(천안분기점)를 지나 호남고속도로(서전주 IC)로 가셔서 구미•순창(국도 27번 진입)으로 가시면 목적지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오시려면 남해고속도로(순천분기점) – 호남고속도로(옥과 IC) - 옥과•순창 27번 국도 순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순창에 오시면 어째서 순창 고추장이 가장 유명한지를 곧 아실 수 있습니다. 먼저 이곳의 고추장 제조자들은 최소 10년 이상 고추장을 만든 경험이 있는 프로들입니다.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지하 암반수와 순창의 태양초를 쓰고 있고, 습기가 많은 기후도 장의 발효를 돕습니다. 또 다른 지역과 달리 늦여름에 메주를 띄워 겨울에 고추장을 담그는데, 이렇게 하면 단맛이 깊어지고 신맛이 줄어든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속성으로 만들어지는 공장 고추장과 달리 8개월 이상의 발효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맛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순창 고추장 민속 마을에는 많은 가게가 있으며, 저마다 자신들의 장과 장아찌 종류를 주로 판매합니다. 지자체의 체계적인 관리를 받기 때문에 위생적이고, 또 전라도다운 후한 인심이 더해져 마음 편하게 장을 볼 수 있습니다. 푸짐하게 펼쳐진 장아찌들의 맛을 보며 돌아다니다 보면 그것만으로 배가 채워질 정도랍니다.
장을 다 보셨다면, 이번엔 ‘순창장류체험관’에 가실 차례입니다. 이곳에서는 순창전통고추장 및 순창 전통 고추장을 이용한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고추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은 고추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어 교육 효과가 높고, 프로그램을 마친 이들에게는 숙성고추장 500g을 증정하기도 하니, 아이와 함께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이곳엔 음식점과 숙박시설까지 함께 있으니, 아예 이곳에서 하루 묵으시며 체계적으로 장을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순창장류체험관에서 푸근한 옛 모습을 들여다보자> (사진 : 한국관광공사)

 

 

때 묻지 않은 자연의 맛, 파주 장단콩마을


장단콩이란 말은 그리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장단콩이란 품종이라도 있는 걸까요? 하지만 알아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장단콩이란 장단 일대에서 나는 콩을 일컫는 말인데요. 일제가 장단 지역에서 수집한 재래콩 중 ‘장단백목’이란 장려품종을 선발해 이를 개발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장단 지역은 한국전쟁 후 민간인 통제구역에 포함되었기에 장단콩 역시 한동안 재배되지 못했는데, 1973년 박정희 정부가 통일촌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구역에 마을을 조성했습니다. 그곳에 들어간 마을 사람들은 다시 콩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이는 1997년 임진각 광장에서 열린 장단콩 축제로 인해 비로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여전히 민간인 통제구역이기에 다른 곳처럼 바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신분증을 맡기고 서약서를 쓰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이쪽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미리 절차를 마치고 임진각에 30인 이상의 단체를 구성해 가시는 분들이 이쪽으로 많이 오시는 편인데요. 임진각에 가지 않고 이곳만 방문하고 싶으시다면 일단 자유로나 통일로를 거쳐 통일대교까지 가신 후, 그곳의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장단콩마을에 전화하면 안내하는 분이 차를 몰고 나옵니다. 그 차를 따라 통일대교를 건너가시면 되는데, 다리 위에 인위적으로 설치한 장애물들이 있어 지그재그로 운전해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 주세요.

 

<장애물이 가득한 통일대교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마을에 도착하면 식당과 공장이 있는데, 이곳의 두부요리는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배를 채우고 나오신 후엔 길거리나 공장에서 직접 만든 장류를 판매하는 걸 구경해보세요. 매년 1만 6천 가마니의 콩을 생산하는 만큼, 이곳에서 생산되는 장의 종류와 양 모두 많은 편입니다. 귀한 장단콩으로 만들어진 만큼, 맛 또한 담백하고 고소하답니다. 콩비지는 입구에 두고 원하는 분들이 무료로 가져가도록 하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으니 잊지 말고 챙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은 2004년 슬로푸드마을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체험을 마련해 관광객의 수를 서서히 늘려 가는 중입니다. 봄에는 장단콩 꼬마장승제를, 여름엔 콩밭매기와 맷돌 체험, 가을엔 장단콩 축제와 과수 따기, 겨울엔 장 담그기와 김장, 전통문화 배우기 같은 체험이 준비되어 있어, 언제든 방문객을 환영할 만한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단, 민통선이니만큼 숙박시설은 없으니, 일몰 전까지 장단콩마을의 많은 것을 최대한 몸으로 겪으며 담으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표 고추장과 된장이 만들어지는 곳에 다녀오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가격은 공장에서 나온 장보단 조금 더 비싸지만, 재래 장이 여름내 머금었던 햇살의 맛은 공장에서 나온 장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성질일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빚어낸 전통 장을 맛보시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