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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한국 생활

역사 속 4월의 이야기


 


봄이 완연히 자리를 잡아가는 4월 입니다. 4월이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뜨고 산책하고 싶어지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는데요. 역사 속 4월, 우리의 선조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역사 속 4월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폴리씨와 한 번 같이 가보도록 할게요. ^^

 

 


958년 고려, 4월 16일 과거제가 처음 실시되다

 

현대에도 고시는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하는데요, 바로 이전 시대인 조선시대에도 공무원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 시험이었습니다.  1,000명 정도 뽑는 과거시험에 3만 명 정도가 응시하기도 했지요. 신분과는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만 되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이기도 한 이 고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원성왕 대에 독서삼품과가 설치되어 관리를 뽑기도 했지만 골품제라는 강력한 신분제도로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웠죠. 그러다 광종 때에 이르러 후주(중국)에서 귀화한 쌍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쌍기는 후주에서 벼슬을 하다 956년 후주의 책봉사(황제의 명령에 따라 제후의 나라에 가서 제후를 임명하고 관직을 주던 사절)였던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들어오게 되었죠. 중국에서 고려까지 오는 고된 길 때문이었는지 쌍기는 병을 얻게 되어 왕궁에 머물게되었는데, 그 동안 광종은 그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사게 되어 그의 귀화를 요청하였습니다. 쌍기는 곧 한림학사(고려시대 학술기관에 속한 정4품의 벼슬, 임금의 조서를 짓는 일을 맡아봄)로 등용되었고, 1년도 안 되어 학문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게 되는 팀장이 되죠. 고려시대는 호족들의 시대니만큼 호족의 반발도 많았지만 광종의 쌍기를 전적으로 밀어주었습니다.

 

[역사 속 4월 - 과거시험 (쌍기의 건의) ]

 

광종 9년(958) 쌍기는 능력 있는 사람이 신분으로 인해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처음으로 과거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때 당시 광종은 쌍기를 굉장히 신임하고 있었기에 쌍기를 지공거(고려시대에 과거를 관장하던 주 시험관)에 임명하고 그해 4월 16일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 최초의 과거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제기될 수 있습니다. 광종은 왜 하필 그 시점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였을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당시 정치상황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요. 광종이 왕위에 있을 때만해도 호족의 세력이 막강해서 자신의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했습니다. 쌍기가 건의한 과거제는 권력의 줄이나 혈연의 끈으로 이뤄지는 인사가 아니라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의 관직 세습을 막으면서 새로운 정치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죠.

 

물론 도입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으나, 958년 4월 16일 과거제가 시작되어 현대 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능력있는 사람을 등용한다는 국가의 기본 원칙이 되고 있습니다.

 

 


1392년 4월 4일,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당하다 (하여가, 단심가)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격동기에는 많은 일이 있었죠. 그 중 정몽주와 이방원의 '하여가'와 '단심가'는 많은 분들이 외우고 있을정도로 유명한데요,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문병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을 당한 장소가 바로 선죽교지요. 현재 선죽교는 북한 지역에 있고, 북한 국보 문화 유물 제 15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392년 4월 4일, 선죽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공양왕 4년, 3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세자 석이 명나라에서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세자를 만나기 전까지 하루의 시간이 남아 이성계는 해주로 나가 모처럼 사냥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말을 이리저리 달리며 활을 쏠 때마다 꿩과 노루가 하나 둘씩 픽픽 쓰러졌습니다. 그러다 말발굽이 떨어진 나뭇가지에 걸리자 천하의 이성계라도 낙마를 할 수 밖에 없었죠. 얼굴과 팔뚝에서 피가 흘렀고 동행했던 부하들은 급히 지혈을 하고 황주로 옮겨갔습니다.

 

[역사 속 4월 - 이성계 사냥]

 

이 사고가 날 시점, 정국은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온건파와 급진파였죠. 정몽주는 고려라는 큰 틀은 유지한 채 병든 부분만 치료하자는 쪽인 온건파였고 이성계는 아예 고려를 없애고 새로운 틀을 만들자는 쪽인 급진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계의 부상은 중대한 사고였죠. 공양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정몽주는 이성계가 없는 틈을 타 이성계의 핵심인력은 정도전과 조준 등을 탄핵해 유배를 시켰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이 소식을 아버지께 전했고 정몽주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몽주는 그 날 이성계를 찾아갔습니다. 이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이성계지만 태연히 정몽주를 맞았고 이성계 아들 이방원은 그런 정몽주는 소매를 끌어 둘만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정몽주는 이방원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돌리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은 문학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습니다. 그 때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고자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

 

 

 

 

[역사 속 4월 - 정몽주와 이방원]

 

 

이 시의 의미는 뒤틀어진 고려 왕실을 뒤로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사이좋게 어울려 살자는 의미의 시였습니다. 정몽주는 이 시를 듣더니 피식 웃었고 좋은 시라며 즉시 답가를 읊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 ‘단심가’

 

 

 

 

이것이 고려왕에 대한 절개를 나타낸 정몽주의 마음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죠. 이 시를 들은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복인 조영규 등을 시켜 선지교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가면 살해를 하라고 명령했죠. 정몽주는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머리에 철퇴(쇠몽둥이)를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정몽주를 제거한 이성계, 이방원은 1392년 7월 공양왕을 폐하고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다!

 

1932년 4월 29일,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의 집에서 아침을 먹던 중이었습니다. 윤봉길은 담담한 모습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윤봉길은 자신의 손목에 차여진 자신의 시계를 김구에게 건넸습니다. 
“선서식 후에 6월을 주고 산 시계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그걸 제게 주십시오. 저는 이제 이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
김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회중시계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식장으로 향하는 윤봉길은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5,6원의 돈을 꺼내 김구 선생에게 내밀었습니다. 
“됐네”
“아닙니다. 제겐 이제 필요 없는 돈입니다”
“후일…다시 만나세”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상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이 날 오전 11시 상하이에 있는 홍커우 공원은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있었습니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 전투승리를 기념하는 경축식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윤봉길은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오른손에는 일장기를,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식장에 입장했습니다.

 

[역사 속 4월 - 윤봉길 의사 의거 직전과 직후, 단상 위 사람들의 모습]

[자료제공 : 윤봉길의사 기념관]

 

11시 50분,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흘러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꼿꼿이 선 채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을 무렵!
“콰광!!!”
윤봉길은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습니다. 윤봉길은 남은 도시락을 다시 던지려고 손을 뻗자 일본 헌병이 윤봉길의 팔과 다리를 제압해 꼼짝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는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폭탄이 터진 단상은 피로 가득했습니다.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인 가와바다 다사쓰구는 그날을 넘기지 못한 채 죽었고 상하이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중상을 입고 12차례 걸쳐 복부 수술을 받았지만 20일 만에 사망했습니다. 이 밖에도 제 9사단장 우에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 등이 크게 다쳤습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상하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오사카로 호송되었습니다. 다시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그 이튿날인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습니다. 당시 25세의 나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의로웠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모진 고민을 받으면서도 김구를 보호하기 위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가 거사를 이틀 남긴 4월 27일, 두 아들에게 남긴 글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역사 속 4월 - 윤봉길 의사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는 순간]

[자료제공 : 윤봉길의사 기념관]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위 세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말이 아직 귓가에 울리는 듯합니다. 역사 속 4월에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네요. 정몽주의 ‘단심가’도 그렇고,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말도 그렇고요. 4월, 그 뜨거운 마음 잊지 말자구요~! ^^ 여러분의 인생에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뜻 깊은 2013년 4월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