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들을 위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자치조례에 따라 올해 9ㆍ3 휴가 일정을 아래와 같이 배치한다.’ 연변인민정부 판공실이 8월 26일에 발표한 휴가 통지문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3일(화요일) 휴식한다. 휴일기간 각 단위는 안전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 정보전달이 잘 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며 중대사건, 돌발사건이 발생할 경우 즉시 보고하는 한편 합당한 대책을 세워 인민군중이 즐겁게 명절을 쇠도록 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일, 이른바 9ㆍ3절 휴일에 관한 공문입니다. 지난해에는 자치주 성립 60년에다 한중 수교(8월 24일) 20년이어서 기념행사가 성대했지만, 올해에는 환갑 지난 이가 진갑을 조용히 보내듯 조촐한 분위기입니다. 올해는 1903년 한인들의 첫 해외 이주(하와이 이민)로부터 1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한중 수교 직전 연변을 취재하고 온 기억을 떠올리며 조선족 문제, 특히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법무부 통계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은 29만 7,000명, 조선족 결혼 이민자는 2만 9,000명입니다. 불법체류자까지 합치면 50만 명은 될 거라고 추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울시 부설 서울연구원의 서울경제분석센터에 의하면 2012년 기준 서울에서 일하는 외국인 15만여 명 중 86.9%인 13만여 명이 조선족입니다.
^조선족은 한중 수교 이후 ‘코리안 드림’을 좇아 본격적으로 한국을 찾게 됐습니다. 조선족 인터넷매체 ‘조글로미디어’에 따르면 한국을 비롯한 해외 노무자들이 자치주로 보내는 돈은 연간 10억 달러로, 자치주 재정 총수입의 2.5배나 됩니다. 한국 3D산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1993년 도입된 산업연수생 제도(2001년부터 ‘1년 연수, 2년 취업’)와 방문 취업제(2007년) 등에 힘입어 조선족은 단순 노무직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일해 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입국자가 브로커 등에 속아 불법 체류자로 전락했고, 주로 청년층이 구직이나 결혼을 위해 서울 등지로 떠나면서 조선족 사회는 가족 해체, 농촌 공동화, 조선족 학교 급감, 청소년층의 정체성 상실 등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통칭 200만 명이었던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는 해마다 줄어 연변자치주의 경우 2009년 현재 80만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조선족 비율은 겨우 36.7%여서 자치주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 노동자들은 실정법상 재외동포이지만 현실은 동포도, 국민도 아닌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일 뿐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재외동포(F4) 비자가 아니라 방문취업(H2) 비자로 일하고 있는데, 미국 일본지역 재외동포들과 달리 F4비자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F4비자를 받으려면 재미ㆍ재일동포들은 본인 부모 조부모 중 한 명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만 증명하면 됩니다. 그러나 조선족은 전문학사 이상 학위 소지자, 법인기업체 대표나 임원, 매출액 10만 달러 이상의 개인기업가 등으로 발급대상이 제한돼 있습니다. 체류기간에 차이가 큰 F4비자로 바꾸려면 국가 공인 기술자격증을 따거나 지방 제조업체에서 2년 이상 근무해야 되지만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먹고사는 사람들로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한국에 온 다음에는 차별과 멸시, 저임과 몰이해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특히 결혼여성이 다문화가족 지원센터에 찾아가면 “중국동포는 다문화가족이 아니잖아요. 우리말을 잘하시죠? 그럼 여기 말고 직업을 구해보세요.”라는 말을 듣는답니다. 여성가족부의 ‘2012년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 조사(1만 5,341가구 대상)’에서는 45%의 조선족 다문화가족이 차별과 무시를 당했다고 답했습니다. 같은 답변을 한 전체 다문화가족의 평균(41.3%)을 웃도는 수준입니다.
^국내에 조선족이 늘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들의 주장과 요구를 담은 재한 언론매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2003년 개설된 ‘조선족 대모임’은 국내 최대의 조선족 인터넷 커뮤니티로, 회원 수 6만을 헤아립니다. 70% 정도가 한국 거주자입니다. 매달 1, 16일 서울에서 발행되는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조선족 대상 신문 중 가장 지면이 많습니다(32면). 구로구 가리봉동을 비롯한 조선족 밀집지역 등에 무료로 깔리는데, 배포 당일 동이 날 정도입니다.
^뼈 빠지게 일하며 노력한 부모세대 덕분에 한국이나 일본 유학을 했거나 중국의 명문대를 나온 ‘3세대’가 대거 등장하면서 조선족 사회는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조선족에 대해서도 발급이 허용된 재외동포(F4) 비자 가운데 우수한 인재(F4-2)로 분류돼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이 지난해 말 현재 3만 명 가깝습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따 취업하거나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전문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 3세대와는 달리 조선족의 한국에 대한 애착은 대단합니다. 한국에 귀속감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은 중국이 공산당 정부 수립(1949.10)에 이어 6·25전쟁 참전까지 하는 바람에 그동안 한국과 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재미ㆍ재일동포들과 아주 다릅니다. 그들이 낯설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편견도 심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수용하고 보다 심화된 교민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칭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이 그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는 재미ㆍ재일동포처럼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쓰이고 있는 이 호칭을 완전 정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 사람들은 재한 중국동포, 줄여서 그냥 중국동포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들 중에는 조선족이라고 하기보다 ‘조선족 동포’라고 불러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족자치주는 보호하고 발전을 도와야 할 한민족의 터전입니다. 더욱이 그곳은 이미 국제어가 된 한글을 세계화하는 데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우리의 해외 어문공간입니다. 재중동포들의 지속적인 이탈로 자치주가 소멸되지 않게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동북 3성의 경제발전을 적극 지원하면 좋겠습니다.
^최근 내한한 하리스 밀로나스 미국 조지 워싱턴대 교수는 인터뷰(중앙선데이 8월 11일자)를 통해 몇 가지를 권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재외동포 가운데 고교를 졸업한 유대계 젊은이들에게 이스라엘 여행 비용을 대주는 ‘출생권 여행(birthright trip)’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 중 한 쪽만 유대인이어도 혜택을 주고, 이스라엘에서 일하기를 원하면 항공료와 함께 거주비도 일부 지원합니다.
^그 자신이 그리스계 이민자의 후손인 밀로나스 교수에 의하면 해외 교민 수가 700만 명이 넘는 그리스 역시 적극적입니다. 소련에 살던 그리스계 주민들에게 자동적으로 국적을 부여하고, 귀화해온 해외 교민 자녀들에겐 대학입시 가산점을 주거나 병역 의무기간을 단축해 줬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게 해외 교민들의 역이민이나 귀화를 장려하는 조치입니다. 한국 정부도 참고해야 합니다.
^피가 4분의 1만 섞이면 자국인으로 간주하는 이스라엘과 달리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국적자가 아니면 법적으로 이방인으로 치는 우리 국적법도 개정을 검토해야 할 때입니다. 거칠게 말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재중동포들을 받아들이는 게 우리로서는 사회적 비용이 훨씬 적게 듭니다. 다문화사회에서의 공동체문화 조성에도 한결 유리합니다. 중국동포들이 우리말을 잘한다고 해서 한국살이의 불편이 적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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