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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박정희편

박정희의 사전에 ‘부패’는 없었다

박정희의 사전에 ‘부패’는 없었다
[ 김 행(金杏)│(주)소셜뉴스 부회장 ]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내던지다
<박정희 대통령 1군사령부 시찰(1971.1.27)>
지난해 10월 2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대통령기록물 기증 특별전-선물과 유품으로 만나는 박정희”를 관람했다. 전시회 마지막 날이기도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여서인지 관람객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전시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박대통령이 단정한 필체로 쓴 친필휘호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1974. 5.20 大統領 朴正熙”. 얼핏 여자 글씨체처럼 보이지만, 글자 하나하나를 뜯어보니 매우 옹골차다. 아니 투쟁적 기운이 느껴진다. 기묘하다. 대통령 박정희, 대체 이 남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에게 조국과 민족이란 무엇이었을까?
 
  재임기간 중 세계 각국의 외교사절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 놓은 선물관을 지나 유품관으로 가니, 그가 직접 사용한 책상과 친필휘호 ‘有備無患’이 또 다시 발걸음을 잡는다. 대통령의 책상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양수책상이다. 자세히 보니 왼쪽 첫 번째 서랍에는 ‘기결’, 두 번째 서랍에는 ‘미결’이라는 예의 여성스러운 글씨체로 써진 견출지가 세로줄을 맞춰 붙여있다. 책상 위에는 왼편에 사진 네 장, 오른편에 사진 두 장이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계산된 배치를 하고 있다. 책상 가운데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결제받침대가 그 무게감을 드러내고 있고. 책상을 보면 그 주인의 성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건 군인 박정희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다. 집무실 벽의 친필휘호 ‘有備無患’과 어우러져, 그의 완벽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 갑자기 야누스(로마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으로 성과 집을 지키며 전쟁과 평화를 상징)가 생각났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뒤베르제(M.Duvetger)는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답했다. 정치란 ‘투쟁’과 ‘질서’라는 두 가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다. ‘투쟁’으로서 정치를 강조한 자들로 마키아벨리, 홉스, 모스카, 파레토, 미헬스, 모겐소 등 정치현실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 ‘힘’(Power)이 설득보다 효과적이며 무엇이 옳은가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고 믿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의 근본적 해결은 ‘적’을 패배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질서’로서의 정치를 강조하는 자들은 플라톤, 루소, 로크, 칸트, 헤겔 등 정치적 이상주의자들이다. 인간은 본래 선하고 이성적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상호계약을 준수한다.”는 주장이다. 정치인 박정희-그는 뒤베르제가 말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남성성과 여성성, 투쟁과 질서를 동시에 추구한 야누스의 머리를 한 이중적 본성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는 사자이면서 여우였고, 호방하면서 치밀했던, 무서우면서 따뜻한, 악하면서 선한 정치지도자였다. 그의 유품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정치목적-조국과 민족을 위해 유비무한의 자세로 일생을 내던졌던 것이다.



국민과 가난을 함께했던 빈농 출신 지도자
<오르간을 치며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박대통령>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유감없이 교차하는 야누스적 면모를 보여주었던 정치인 박정희에 대한 생각도 잠시. 어라! 그와 육영수 여사가 사용했던 2인용 노란색 소파와 주색 3층장은 정치인 박정희가 아닌 인간 박정희를 생각하게 했다. 노란색 천소파는 70년대 당시 우리 집 거실에 놓여있던 가죽소파보다도 행색이 초라했다. 주색 3층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쓰셨다고 한다. 알려진 것 같이, 그는 죽는 날까지 사치를 몰랐다.(피격을 당한 후, 병원에 당도했을 때 허리띠가 너무 낡아 의사들은 그가 대통령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는 증언이 있다.) 가난한 나라 대통령 박정희는 국민들과 그 가난을 함께 했다. “막걸리는 밥이야”라며 모내기 때 농민들과 막걸리를 들이키는 사진을 보면, 그는 영락없는 촌부일 따름이다. “구미보통학교 6학년 때인가 추석 전날이라고 학교에서 오전수업만 하고 보내줬어. 20리 길을 걸어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떡 치고 전 부치는 냄새가 마을 전체에 진동하는 거야. 구수한 냄새에 정신이 없더군. 그런데 정작 우리 집에 들어섰는데 아무 냄새도 없고 썰렁한 거야, 시무룩한 얼굴로 부엌을 기웃거리는데 형수가 앞마당의 홍시를 하나 쥐어줬어. 나는 눈물을 참았어. 그날의 슬픔을 잊을 수가 없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절대 숙제인 가난을 풀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때 김일성, 수하르토, 마르코스는 무엇을 했는가? 북한은 김일성이 죽은 1994년부터 3년간 무려 8억 6천만 달러(당시 북한 주민이 1년간 먹을 식량은 3억 달러였고, 그 3년 동안 굶어 죽은 북한 주민이 250만이라는 추정기사가 있다.)라는 거액을 들여 김일성기념관을 지었다. 2005년 김일성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그 사치스러움에 치가 떨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32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세계 제일의 부패독재자 수하르토의 박물관을 관람했을 때도, 그 호사스러움에 눈이 뒤집혀 내 나라 내 민족도 아닌데 분노가 치밀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은 어떠했나? 부인 이멜다 여사가 구두만 수천 켤레를 가졌을 정도로 부패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우리는 북한보다 가난했고, 인도네시아로부터는 안남미를 구호물자로 받아 끼니를 해결했으며, 필리핀은 선진국가의 모델로 ‘우리가 배워야 할 나라’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랬던 세 나라는 독재자의 부패로 인해 처참히 무너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들과 다른 점은 “독재했지만 부패하지 않은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당장 백성의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그 해결책으로 자본주의 개발독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숱한 생명이 걸린 군주의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가 아니라 좋은 결과”라고 했다. 또한 그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역량’, ‘행운’, ‘시대적 필요성’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마키아벨리의 기준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한 정치지도자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그날 이후 대학가에 괴소문이 흉흉했다. 박 전 대통령이 스위스 은행에 엄청난 액수의 검은 돈을 빼돌렸다는 것이다. 그 괴소문을 우리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분노로 피가 끓었다.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세 자녀 모두 외국으로 도피할 것으로 알았다. 모두들 스위스 비밀금고에 숨겨져 있는 우리 돈을 찾아와야 한다고 흥분했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는 경선 후보 등록 첫날 등록을 하지 않았다. 첫날 이명박 후보가 등록한다니까 그 다음날로 피하려고? 아니다. 박근혜 후보의 실토. 후보 등록비용이 없었단다. 등록 비용이 2억 5000만 원인데 5000만 원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A씨가 회사 퇴직금으로 등록비용을 빌려주었다.」1) 만약 박 전 대통령이 국외로 돈을 빼돌렸거나 부정부패로 재산을 축적했었다면, 오늘의 박근혜 전 대표도 없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들은 모두-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까지- 부패자금으로 개인적인 재산축적을 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과장을 지낸 함수용씨의 증언-박 전 대통령은 변변한 양복과 구두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박대통령께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시다가 바지 앞지퍼가 올라가지 않은 적이 있죠. 지퍼의 이빨 두개가 빠져 있었어요. 벌써부터 이빨이 빠져있었는데 조심조심 입으시다가 마침 그날 결국 고장이 난 것이지요. 청와대 인근 세탁소에서 지퍼만 바꿔달아 갖다드렸죠. 육영수 여사님이 돌아가신 후였는데, 부하들에게 차마 ‘지퍼 고쳐오라’는 말씀을 못하신 거죠.”, “전라남도 광주를 가셨을 때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키가 작으신 대통령께서는 늘 구두 굽을 하나 더 덧달아 신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한쪽 구두 굽이 떨어져 나갔어요. 다음 날 행사참여도 있으신데. 급히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가져다주었죠. 누구 구두라고는 말하지 않고요. 그런데 구두닦이가 구두를 고치지 않고 집으로 가버린 거예요. 구두닦이를 수소문해 찾으니, “한 10년 정도 신으신 것 같은데, 차라리 새 구두 사세요. 고치기 힘들어요”하는 겁니다. 결국 새벽 3시까지 굽이 떨어진 쪽의 높이에 맞춰 나머지 한쪽의 굽을 갈아냈습니다.”, “당시엔 청와대 2층에서 대통령 가족이 살았어요. 증축 전이지요. 경호원들도 2층은 출입이 금지됐습니다. 대통령이 돌아가신 다음날, 2층을 점검했어요. 안방에 조그마한 화장실이 붙어있었는데, 변기수통 뚜껑을 열어보니 벽돌이 두 장이 들어있더군요. 경호원들도 몰랐으니, 직접 벽돌을 넣으셨겠죠. 지독히 절약하셨습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은 ‘위로부터의 혁명’ 2) 이 진행된 기간이었다. 미국의 계간지 ‘포린 어페어즈(1961년 10월호)’는 5.16 군사혁명까지의 한국을 주저 없이 ‘한국에서의 실패’라고 명명했다. ‘실업자도 노동인구의 25%, 국민 1인당 GNP는 1백 달러를 밑돌며 전기출력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천만 달러, 그러므로 남한의 경제적 기적 가능성은 제로다.’라며 ‘북한보다 뒤떨어진 한국’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5년 후, 남북은 역전됐다. 혁명가 박정희가 몰아친 결과다. 엘렌 K. 트림버거는 영국, 프랑스 등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시민·노동자의 폭력적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대비하여 일본의 명치유신(1868년), 터키의 케말 파샤의 혁명(1923년) 등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초법규적 정치권력의 접수와 변화의 주도(혁명)는 구체제의 군부와 관료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유도된다. 그때 대중의 참가는 거의 볼 수 없다. 초법규적 혁명행동을 취하는 군부의 움직임은 대중의 동향과는 무관하며 때로는 양자가 적대적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5·16혁명과 그 뒤의 박정희 정치 18년간은 트림버거가 말한 ‘위로부터의 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혁명 당시 박정희 의장은 ‘왜 혁명이 필요했었는가’라고 자문하고 ‘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5·16혁명 당시 한국은 半독립국가, 半식민지국가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61년 한국의 재정자립도는 39.2%, 국방비는 겨우 4.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한국이 재정·국방비 측면에서 비로소 독립국가의 면모를 확보한 것은 제2차 5개년계획(1967년∼1971년)을 조기 초과달성한 70년도 예산부터였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후 10년 만에, 재정자립도 94.5%, 국방비자립도 83.9%라는 기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제적 독립국가 대한민국은 70년대 이후의 얘기다. 그 선두에 박정희가 있었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에즈라 보겔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고 단언했다.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박대통령의 청렴
 
  국제투명성 위원회(Transparency International) 와 독일 괴팅겐 대학이 공동으로 조사하여 발표한 2009년도 부패인지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0점 만점에 5.5점을 얻어 조사대상 102개 국가 중에서 39위를 차지하고 있다. OECD 가입국가 중 최하위다. 많은 학자들(Baumal, Murphy, Mauro, Tanzi etc.)이 부패가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여전히 부패공화국, 이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취임사에서 ‘빈곤과 부정부패와 공산주의’를 우리의 ‘3대 공적’으로 규정했다. 특히 부정부패는 인간의 양심과 친화력을 마비·저해하는 것으로 보고 부패추방을 유난히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국의 부패통제는 커다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는 평가다. 이 시기에는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많은 외자를 도입하였고, 국내산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당 또는 정치인과 정경유착이 심화된 시기였다. 4대 의혹사건(일제 새나라 승용차의 면세도입, 증권파동, 워커힐 공사비 횡령, 빠찡코 수입에 따른 사건),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을 특정업자들이 고시가격을 위반하면서 막대한 폭리를 취하도록 묵인한 3분 폭리사건, 사카린 밀수사건 등이 대표적인 비리사건이다.
 
  제4공화국(1975-1979)에서는 서정쇄신이란 이름 하에 공무원의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제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서정쇄신을 두 가지 의미로 정의했다. 첫째, 공무원의 부조리를 뿌리 뽑고, 국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관 기강 확립’을 뜻했다. 둘째, 넓은 의미로 사회정화운동이요, 건전하고 명랑한 국민정신을 진작시키는 정신개혁운동을 의미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4공화국 역시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박정희 개인에겐 ‘부패’가 없었다. 이것이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했던 원동력이었다.
 
  박대통령 사후,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본인 또는 직계가족이 ‘부정’했고 ‘부패’해서 나라전체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경제규모 11위이지만 부끄럽게도 부패인지지수는 39위인 대한민국. 이 나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면,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가 청렴해야 한다. 지금, 전국에 수많은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4대강 사업을 두고도, ‘워터(Water)게이트’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부디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시길 바란다. 그의 사전에도 ‘부패’라는 단어는 없기를. 박정희 대통령의 사전처럼.
 

  1) 윤창중 논설위원, 문화일보 ‘오후여담’ 2009년 2월 6일자 인용
 
  2) 혁명의 다양한 정의
  - 트림버거(Ellen K. Trimberger): ˜혁명이란 구체제의 지배적인 사회그룹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붕괴시키고 중앙국가기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는 것˜
  - 스카치폴(Theda Skocpol): ˜급격한 정치구조의 변혁을 통해서 그 사회의 기존 제도나 계급구조까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시키는 현상˜
  - 윌호이트(Fred Willhoite): ˜갑작스럽고 거대한 변동이 비합법적으로 전개되어 기존의 지배체제를 몰락시켜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변혁˜
 
  3) 강성남, 『관료부패의 통제전략』, “역대정부의 부패통제정책”,장원출판사, 1999
 
  필자약력
  59년 서울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서강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수료
  (주)소셜뉴스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