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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인물 이순신편

이순신장군의 생애와 업적(요약)

이순신장군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

(※ 모친 초계(草溪) 변씨의 꿈에 시부 (媤父)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이조 (異兆)가 있어 그대로 명명)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이 충무공 (1545 - 1598)
- 휘(諱)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 , 본은 덕수(德水)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 공이 순국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임. 

증직 과 추증

- 선조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
-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음.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
(국경경비)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함.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



임진년 (선조 25년 : 서기 1592년(48세))

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전(신묘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한 충무공은 미구에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좌수영관할 아래 모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장비도 보강 하는등 온갖 방비를 주력하였다.

임진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 시범 항해를 하자 하루뒤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공은 전선 24척을 모아 5월 4일 출동하여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이어, 5 월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월 2일 당포에서 승첩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당포해전 이었다.
그리고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4차 부산 대승첩을 거두어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계사년 (선조 26년 : 서기 1593년(49세))

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계사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자기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던 공은 7월 15일 여수 좌수영 본영을 그대로 둔채 전투 본부를 거제 한산도 진으로 옮겨 왜적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8월 15일 공을 임명하여 삼도 수군을 통괄하는 한편 전라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은 장기전에 대비하여군무에 정진, 수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전선을 만들었 으며 각종 무기를 준비 하였다.

갑오년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

명나라 장수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고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였다.
3월에 명나라 지 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고, 공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 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까지 하였다. 전염병으로 10여일을 앓는등 자주 아팠으나 군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고 또 글(제문)을 지어 위로해 주었다.
10월에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 연합으로 협공하여 승리하였다.


을미년 (선조 28년 : 서기 1595년(51세)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나라는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공은 한산도 진에서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
군량을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전선을 정비하였다.

병신년 (선조 29년 : 서기 1596년(52세))

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

전쟁 중에도 공은 항상 어머님을 잊지 못하였다. 일기 도처에 어머님 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으며, 휴전중의 말미를 이용하여 잠깐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서 행복을 느끼 기도 하였다. 병신년은 어머님이 82세 되시던 해로 10월 7일에 본영(여수)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모자가 만난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정유년 (선조 30년 : 서기 1597년(53세))

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왜와의 화의가 깨어지자 왜적은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정월, 선조대왕은 공에게 출병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본측의 간계를 꿰뚫어 본 이순신은 본 영을 벗어나 함부로 출동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옥에 갖히고, 노모는 이 소식을 듣고 고음천(여천)으로부터 고향 아산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별세하였다.
28일의 옥고를 치르고 백의 종군이 되어나온 공은 아산에 가서 어머님의 영구만을 보고 치 상도 끝내지 못한채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은 전멸하였고, 다시 삼도 수군 통 제사가 된 공은 9월 16일 패잔 전함 12척으로 왜적 대함대 133척을 무찔렀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명량대해전이다. 그러나 10월 10일 셋째 아들 의 부음을 듣고 공은 비통함에 잠긴다.

무술년 (선조 31년 : 서기 1598년(54세))

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

임진란이래 7년의 긴 전쟁은 수 많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갔으며, 충무공에게는 최후의 전자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7월 명나라 수군과 연합 함대를 결성한 우리 수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순천 소서행장의 군대를 공격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 전투가 저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때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나 공의 나이 겨우 54세로, 마침내 충무공은 자기의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청소년기의 삶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중년기의 삶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함.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 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

이순신의 업적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명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훈련원에서 무과 시험을 치르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리고 32세가 되어야 무과에 급제를 하였습니다.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나갔습니다.

35세때 충청도 병마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습니다.

36세 때는 전라도 발포의 수군 만호가 되어 수군 경험을 쌓았고요.,.

42세때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가 되고 43때 녹둔도 둔전관의 겸하였으나 이일의 모함으로 파직이 됨어 백의 종군하였습니다...

47세때 우리가 잘 아는 전라 좌수사 자리에 오른 것이죠 그때 왜구 침략을 예견하여 군사를 훈련 시키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여 그 군사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죠...)

1592년 6월 16일 옥포 해전이 일어납니다. 거제시 옥포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옥포 해전이라고 하죠..이때 일본 군의 장군은 도도 다카도라 였습니다.

1592년에는 6월 17일 적진포해전, 사천해전(이 전투에서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사용하죠...) 6월 2일 당포해전, 6월 5일 당항포 해전 6월 6일 율포해전 8월 14일 한산도 대첩...

(학익진 전법으로 크게 승리하죠..) 8월 16일 안골포해전 장리모 해전 10월 5일날 화준구미 해전 다대포 해전 서평포 해전 절영도 해전 초량목 해전 부산포 해전이 일어나죠...

1593년 3월 6일날 웅포 해전 제 2차 당항포해전 이 일어났고(1593년엔 이순신장군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됩니다) 1594년 장문포 해전 (1597년 칠천량 해전 원균의 전투인데 이때 원균이 전사하였죠)(빠트린거.. 1597년 때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힙니다... 백의 종군하는데 다시 오르죠.,.) 1597년에는 어란포해전 벽파진해전 명량 해전이 일어 났습니다

1598년 절이도 해전 장도 해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1598년 12월 16일날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숨을 졌습니다.. 그리고 1643년에 선조 임금이 충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이래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출생1545 4월 28일~사망1598 11월 19일

1545년4월28일 한성건천동에서태어났어요

1564년(명종22년) 방씨와 결혼하여 아들(회)가태어납니다

1572년(선조5년)28세때 무과시험에 떨어집니다

1576년(선조9년)32세때무과시험에합격해서 함경도동구비보의 군사책임자가됩니다

1579년(선조12년)에훈련원봉사가됩니다

1580년(선조13년)발포수군만호가됩니다

1583년(선조16년)건원보 권관과 훈련원 참군이됩니다

1583년(선조19년)사복시 주부를거쳐함경도조산보의군사책임자가됩니다

1587년(선조20년)녹둔도둔전관직을겸하던중파됩니다

1589년(선조22년)에정읍현감이됩니다

1591년(선조24년)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됩니다

1592년(선조25년3월에거북선을완성하고 4월에임진왜란이일어납니다그해한산도대첩에서승리합니다(첫전투는옥포해전)

1593년(선조26년)삼도수군통제사가됩니다

1597년(선조30년)원균의모함으로옥에갇혔다가백의종군의벌을받지만다시삼도수군통제사에임명됩니다

그해명량해전에서12척의배로왜군133척의배중에36척을격파시키고 적장을(마다시)전사시킵니다

1598년(선조31년)노량해전에서왜군의총탄을맞아장렬히전사합니다

1643년(인조21년)충무라는시호를얻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업적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은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장군이 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한 때 원균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옥중생활을 겪고 두 번의 백의종군이란 시련도 있었지만 정유년 일본이 재 침략하자 복위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이 탁월하였으며 특히 해전에서의 전략이 뛰어나 학익진법을 비롯, 많은 전투진법을 개발하여, 실전에 적용하여 패전없이 승전을 거둡했습니다. 또 기존 전함 판옥선을 변형하여 거북선 을 개발제조하여 실전에 투입시킴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 그리고 거북선과 화포 등의 뛰어난 무기를 잘사용했기 때문으로서,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방어하고 격퇴함으로서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역사에 남겨졌습니다.

거북선에 대햐여

거북선의 성능

거북선은 해상 전투력을 고려하여 당시의 전선 판옥선을 별도로 변형 고안한 것으로서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입속에서 대포를 쏘게 하였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또 비록 적선 수백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거북선의 구조 및 형태

거북선의 크기는 기존의 판옥선과 같았으며 위에는 판자로 덮었습니다 판상에는 좁은 십자로()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외에는 모두 도추()를 꽂아서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입이 대포의 구멍이 되게 하였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습니다. 좌우에 각각 여섯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요. 그 전체의 모습이 대략 거북이와 같았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해전

거북선을 처음 등장시킨 해전은 옥포해전 그 다음에 벌어진 사천포 해전이었습니다. 사천포해전은 1993년 5월 29일에 벌어졌던 해전인데요. 이 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등장시켰습니다. 판옥선을 변형 개발하여 건조한 시기는 물론 그 이전이었으나 사천포해전 이전까지는 잘 다루지 못해서 출전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의 전투

이순신장군 전투는 너무 많아서 답변드리려 그 내용이 엄청 많습니다. 그래서 이 항목은 제가 블로그에 포스팅하여 놓은 주소를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순신장군이 남긴 것

한편 이순신장군은 충성심과 효심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탁월하여 임진왜란 때의 실전 전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집필했으며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

1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선을 정비해 두어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대첩의 승리는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은 물론 거북선과 화포 등 뛰어난 무기를 잘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3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은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고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적의 작전을 부수고 남해 바다를 장악하였음은 물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군대는 큰 용기를 얻었으며 일본군은 크게 사기가 꺾였다.
4
노량 해전은 일본과 치른 마지막 전쟁으로,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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