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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존경하는 인물 이순신편

이순신이 조선수군 패잔선 12척 지휘를 시작한곳

1597년 7월 16일(음력), 이순신과 조선민중이 만든 동양 최강 조선수군은  칠천량앞바다(거제도)에서 일본수군에게 궤멸당한다.  조선왕 이연(선조)은 조일7년전쟁 승승장구 조선을 구한 이순신을 왕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한산도 수군본영에서 체포하여 압송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3월 4일 옥에 갇혔고, 4월 1일 감옥에서 나와 백의종군길에 오른다. 불과 4개월만에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나기에 바뿐 군대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만여명에 달하는 수군과 100여척의 전함은 칠천량앞바다에 수장당했다.

 

경상우수사 배설 또한 마찬가지다. 수많은 적들에 둘러쌓인 공포를 못이겨 정찰임무 도중 12척을  이끌고 도망가 하동 노량진에 숨어든다. 칠천량의 패전으로 다급헤진  왕 이연과  기득권세력들은 자신들이 죽이려햇던 이순신을 백의종군길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쥔자들의  특성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원칙과 기준이 없다. 자기들의 이익과 살길만이 기준이다. 하동 정성의 숙사에서 재임명장을 받은게 1597년 8월 3일 아침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바로 노량진으로 가 배를 지휘하지 않고 전령을 보내 배를 전라도로 항해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는 정성,하동두치,석주관,구례,압록강원,곡성,옥과,석곡강정,순천,낙안,보성,군영구미등 전라도 남방의 내륙지방을 330여km를 돌아 보성 회령포에 이르러 승선하여 지휘를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더군다나 왜의 대군이 하룻사이를 두고 이순신일행의 뒤를 바짝 따르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서 말이다.

 

이유는 명료햇다. 이미 백의종군길에 패전소식을 접하고 도망나온 12척의 실태를 조사한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  패잔선 12척은 전의가 전혀없는 배설의 지휘체계에서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

- 수군의 사기는 말도 못한다

- 전선(판옥선) 1척당  190명(사군과 격군포함)이 있어야 하는데 90명이하로 격감되어있다.  사군은 포,화살을 쏘는 병사고 격군은 노를 젓는 병사를 말한다.

- 군량이 결핍되어 아사상태다

- 활,화살,화약등이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순신은 전라도 내륙지방을 돈것이다.  이 우회 노정에서 1천여명의 장병을 확보했고, 수십명의 장수와 군관들이 모여들었다.  군량도 약 1개월분을 확보했다. 가는곳마다 조선의 민중들은 통제사께서 오셨으니 이제 살았다며 반겼고 스스로 수군으로 편입하고, 각종 물자들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임명장을 받은지 보름여가 지난 1597년 8월 19일, 회령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거행햇다. 8월 20일 승선하여 함대를 직접 지휘한 이순신은 회령초앞이 협착하기때문에 적의 협공을 받기 쉬우므로 이진(해남 북평면 이진리)로 함대를 옮겼다.

 

이후 한달도 안 지난 1597년 9월 16일, 역사의 대반전, 진도 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게 된다. 그 역사적 현장 회령포에 다녀왔다. 지인의 초청으로 보성녹차밭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행과 같이 식사를 하러 나와 방문하게 되었다.  

 

 

 

[사진1] 회령포 앞바다 전경이다. 둥그렇게 보이는 산이 성두라 불린다.  이 바다에 12척의 조선군 판옥선이 정박했고 이순신은 1597년 8월 20일 승선하여 지휘를 시작한다. 420여년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회령포를 바라보며 비장했던 이순신과 참모들, 그리고 조선수군들과  그 곁을 지켜보던 민중들의 기대감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참을 서서 그날의 그 장면을 연상해보았다.

 

 

[사진2] 김성남 어르신 (83세)

마을 느티나무 정자에서 우연히 만난 어른이다.  수군의 흔적인 산성을 둘러보고 정자에 앉아 들은 어르신의 일생은 파란만장햇다.

 

 

[사진3]마을 뒷산에서 [사진1]의 성두로 이어지는 산성이 있다하여 안내를 받아 산을 오르고 있다. 조선수군과 관련이 있는 성이다.

 

 

[사진4] 지인이 딛고 있는 바위부터  위쪽으로 성을 쌓았던 돌들이 이어져있다. 풀이 우거져 사진상으로는 잘 안보인다.  사진위쪽으로  죽 이어져 성두까지 갔다고 한다.

 

 

[사진5] 성곽의 흔적이다. 커다란 석재

 

 

[사진6] 작은 입간판 하나 없었다. 아쉬웠다. 이런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라면 회령포에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으면 싶다. 그저 휘황찬란하고 멋들어진것만 건축하고 보이기에 급급하기보다, 이런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역사적 현장에 대한 스토리를  오늘에 되살려내는 일이야 말로  너와 나 우리모두의 몫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