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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자유게시판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이란

孟子(맹자) 梁惠王章句上(양혜왕장구상)에 나오는 구절로

齊(제)나라 宣王(선왕)과 孟子가 王道(왕도)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가 배경입니다.

 

어느 날 제선왕이 정사를 보고 있는데 저 아래쪽에

소를 끌고 지나가는 자가 있으므로

“소를 어디로 데려가는냐” 하고 묻자

 

소끄는 자가 대답하기를

“새로 만든 鍾(종)의 틈새를 소피로 바르고자

죽이러 갑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은 벌벌 떨며 죄없이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소끄는

자에게 살려주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소끄는 자가 묻기를

“그러시면 새로 만든 종에 피바르는 의식을

폐하리이까” 하니,

 

제선왕이 대답하기를....

“어찌 폐하리요 ?

소대신 양으로 바꾸어 시행하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소가 벌벌떨며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하는

제선왕의 惻隱之心(측은지심)을 지적해내어

부족하나마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반면, 소나 양이나 똑같은 생명을 가진 동물인데

큰 것(소) 대신 작은 것(양)으로 바꾸어 죽게하였으니

군주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백성들이 군주를 아끼는

사람이라 평할 것이라고

제선왕의 단견과 치우침을 지적해 줍니다.

 

눈 앞의 소는 보았는데...

양은 어찌 보지 못하였느냐고....

인간은 모두 개체로 태어났으므로 현재

자신의 감정에 우선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감정이 비록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일지라도

그 마음의 발로가 개체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은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의 적절치 못한 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牛)를 통하여 느낀 측은지심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양(羊)에게까지....

그리고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개개 존재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적용되어야 했던 것이고 그랬다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는 말은 할 수 없었겠지요.

 

우리 일상생활의 현실로 돌이켜 볼 때 ...

양으로 소를 대체해 버리고 아주 당연한 일을

했다고 자기합리화한 행동은 없었는지...

 

또, 개체성의 한계에서 생기는 수많은 단견들을

당연히 옳은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개체성의 한계와 기준으로 만든 보잘것 없는

생각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마구 난도질하지는

않았는지...

 

내 감정에만 빠져 타인의 감정을 소홀히 여기고

지나치지 않았는지...

 

내 고집에만 집착하여 타인의 환경과 어려움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내 自高함에만 취하여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내 경험의 범주에만 갖혀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발전의

길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명은 하나인데... 나누고 쪼개서 보지는 않았는지...

그랬다면 오직 소에게만 집착하는 제선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겠지요...

 

작은 생명체 하나에서 느낀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도

이 우주 전체에 대입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다시금 마음에 새겨보는 글

~^* 見牛 未見羊이라.. *^~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