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2월 풍속화 1) 1963년 2월 1일 장충체육관 개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실내 체육관이 어딘지 아시나요? 바로 장충체육관입니다.
장충체육관이 서울 중구 장충동2가에 1963년 2월 1일 개관했습니다. 개장기념 제1회 동남아여자농구대회를 개최했고,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프로레슬링 경기와 88 서울올림픽 유도, 태권도 경기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본래 육군 체육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7천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것이랍니다. 대형 철골돔으로 이루어진 장충체육관은 당시에는 무척 파격적인 설계였답니다. 실내체육관 건립으로 계절, 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실내 경기를 할수 있게 되었죠. 이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선출되기도 했죠.
장충체육관은 지난 5월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는데요. 지하2층, 지상3층, 증축면적 3,045㎡를 포함한 연면적 11,429㎡, 관람석 5,077석(419석 증가) 규모로 재정비하여 올해 12월 완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리모델링을 마치면 문화 공연도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체육공간으로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역사 속 2월 풍속화 2) 1919년 2월 8일 독립 선언서 발표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도쿄 조선 기독교 청년 회관. 600여명의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백관수는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회의장은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기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곧 들이닥친 일경들에 의해 해산, 학생 대표 1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2·8 독립선언은 조선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주 독립국이며, 일제의 침략과 국권 찬탈이 사기와 폭력에 의한 것임을 규탄, 식민지 정책의 야만성을 고발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혈전을 불사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천하에 선언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선언서는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최남선이 3·1 독립 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했다고 합니다. 웅변대회에서 모여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도쿄와 각 지역 신문사, 잡지사, 학자들에게 보냈는데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이 있어 지금의 우리가 주권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겠죠.
역사 속 2월 풍속화 3) 1398년 2월 8일 숭례문 창건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은 태조 4년에 축조를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습니다. 지금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 지붕이지만 본래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다고 합니다.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 아치 모양의 출입구가 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2층을 올린 형태입니다. 양측에는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1908년 길을 내기 위해 헐어냈죠.
숭례문 현판은 다른 문들과 달리 세로로 되어 있는데요. 이 세로 현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요, 숭례崇禮는 단어 그대로 예를 높인다는 뜻이죠. 풍수지리적인 풀이로는 숭례문의 예(禮)자는 오행으로 볼때 불(火)에 해당되는데, 여기에 '높이다' '가득차다'라는 의미의 '숭(崇)'자와 함게 써서 수직으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이루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 글씨는 태종의 큰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직접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06년 3월부터 서울시는 숭례문의 중앙 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지난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하여 목조 건물의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겨놓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었습니다. 당시 까맣게 그을린 숭례문을 보며 많은 국민들이 슬퍼했었죠. 지금은 복원 공사 마무리단계인데요. 가림막이 철거되었고 오는 4월이면 복원된 숭례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었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서 제 모습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역사 속 2월 풍속화 4) 1393년 2월 15일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다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왕조. 그렇다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어떻게 정해졌을까요? 국호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조선 건국부터 이야기 해야하겠죠. 고려 무신 집권 말기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성계, 정도전 등의 급진 개혁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가짜 왕으로 몰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웠는데요. 군제를 개편, 군사권을 차지한 후 과전법으로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죠.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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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一百番) 곳쳐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 님향(향)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 줄이 이시라
정몽주 「단심가」 |
정몽주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부른 이방원의 하여가와 이에 대한 답가인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의 단심가입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변함없는 충절을 확인하고 선죽교에서 그를 살해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요.
태조(이성계) : 명나라에서 어서 국호를 개정하여 보고하라 재촉하니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자 이렇게 모였소. 신들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신하 1 : 조선은 어떠신지요. 옛 국호였던 단군 조선의 맥을 이어 우리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신하 2 : 그것도 좋지만 전하의 고향인 화녕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태조(이성계) : 조선과 화녕 모두 국호로 부족함이 없는 것 같구려. 예문관학사 한상질이 명나라로 가 둘 중 하나로 선택을 받아 오도록 하시오.
<이 이야기는 가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
급격한 변화는 사회 불안을 초래할 수 있어 처음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단군조선의 맥을 잇는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옛 이름 '화녕'이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두 개의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해 줄 것을 명나라에 청했고 조선이 국호로 결정되었답니다.
그 외에도 고종 23년인 1886년 2월 5일 노비 세습제 폐지, 노비 자녀의 매매 금지와 자동으로 양인이 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어요. 고종 31년에는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노비제 자체가 완전히 폐지됐죠.
1988년 2월 17일에는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남극 세종과학기지가 준공되었어요. 1978년 처음 남극 탐사를 시작했던 우리나라는 86년에 33번째로 남극 조약 서명 국가가 되었는데요. 남극 자원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연고권을 획득하고자 기지를 설치한 것이 처음 목적이었어요. 세종과학기지가 준공된 날은 세종대왕이 승하하신 1450년 2월 17일과 같은 날이기도 해요. 과학·기술 분야에 큰 발전을 이룩한 세종, 그의 이름을 딴 기지의 준공일이 절묘하죠?
가까이는 2007년 2월 20일에 수촌리 1호 고분 금동관을 공개했는데요. 백제 금동관 중 가장 정교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3년 전인 2010년 2월 24일에는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가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쇼트프로그램, 종합점수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는 쾌거를 이뤘고요. 25일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이 각각 취임한 날이기도 해요.
2013년을 살고 있는 지금 과거의 2월을 되돌아 보니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도 있고,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이야기도 있어요. 나중에는 2013년 2월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누군가도 있을 텐데요. 이렇게 많은 날들이 지나 오늘이 되었다니 놀라움과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보내는 일분 일초가 하루를 만들고, 일주일을 만들고, 한 달을 만들고 있잖아요~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역사의 주인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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