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吉林)시에 사는 동포 독자가 ‘신동아’에 글을 보내왔다. 현지에서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그는 조선족이 한국어 교육을 외면하는 사이, 정작 중국인들은 한국 배우기에 열심이라며 우려한다. 글로벌 시대에 민족이란 무엇이며, 그 미래는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까. 이는 비단 중국 동포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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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시 세종한글학교 학생들. 조선족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됐지만 학생의 95%가 한족 등 주류민족이다.
나는 중국 지린시(市)에 사는 조선족이다. 지린은 옌볜자치주를 제외하고 한국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중국에서도 100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네이멍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쑹화강이 좋아, 용담산성(龍潭山城·고구려의 산성)이 좋아 일생을 이 고장에 다 놓은 지 어언간 30년이 지났다.
봄이 오면 매번 용담산 정상에 올라 지린을 한눈에 안아본다. 용담산은 용, 즉 제왕이 태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고,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유유히 흐르는 쑹화강의 물길은 S자 모양으로 지린을 동서로 갈라놓아 마치 청룡이 북으로 날아가는 듯하다. 겨울에는 성에꽃이 나뭇가지마다 아롱지는데, 그 미묘함과 아름다움은 어디 비교할 데가 없다. 600년 험난한 역사에서도 이 고장은 항시 풍조우순(風調雨順)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신조가 아니라 할 수 있으랴.
한글학교에 조선족이 없다
나는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후 지린시세종한글학교를 세워 한글학교 운영에 전념해왔다. 이 학교는 2011년과 2012년 지린시교육국 평가에서 우수 민영학교, 우수 교장단위로 선정됐다. 또 작은 어종(語種)으로는 유일하게 민영학교이사회의 이사학교가 됐다. 영어 같은 큰 어종 학교가 매년 우수학교, 우수교장으로 독판치는 가운데 거둔 전대미문의 성과라 하겠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암울하기만 하다. 주류 민족의 틈바구니에 끼어 간신히 연명하는 학교 모습이나, 번연히 조선민족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보다는 주류 민족이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우는 현실 앞에서 나는 늘 머리를 조아리며 조선족 학생을 하나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다. 구걸이나 다름없다. 가슴에는 숯덩이가 이글거린다.
학교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배우려는 학생, 둘째는 가르치는 선생, 셋째는 오고가기 편리한 학교터다. 작은 어종 학교로서는 이 세 요소를 모두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세계 경제위기 이후 중국에서도 한국이나 일본으로 나가려는 이가 현저하게 줄면서 학생 모집이 매우 어려워졌다. 한때 지린에 한국어학교가 무려 24개나 됐는데, 지금은 달랑 서너 개만 남았다. 그나마 정규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세종한글학교가 유일하다.
학교터 확보도 쉽지 않다. 나는 부자가 아니기에 학교 소유의 건물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세다, 세금이다, 관계비다 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다. 친구들도 왜 학교 운영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며 허파에 바람 들어갔느냐고들 한다.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모로 지원대책을 강구해봤다. 지린시교육국이나 민족사무위원회에 가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비학력 민영학교에 대한 예산은 아예 없다며 거절당했다. 한국 정부의 여러 부서에도 지원 신청을 했으나, 그들은 교육지원금은 중국 각 대학교나 국영학교에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민영’이란 딱지 때문에 졸지에 고립무원에 빠져버렸다.
한편 생각해보니 아차, 나의 잘못이라고 느꼈다. 누구의 도움을 바라고 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아닌데, 왜 바람을 가졌는지 후회스러웠다.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사들이 무언가를 바라고 일제와 피 흘리며 싸웠을까. 고립무원이라 해도 내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다짐했다.
해마다 뛰는 임차료에 학교는 지금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영어학교나 중소학교 방과후교육은 시간당 30~50위안(약 5500~9000원)의 학비를 받아도 학부모들이 서슴지 않고 돈을 내지만, 한국어나 일어는 시간당 학비가 10위안 이상만 되어도 학생들이 달아난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고, 지린의 풍토는 이미 이렇게 돼버렸다.
세종한글학교의 학생은 95%가 한족(漢族) 위주의 타민족이다. 이들은 일단 배우기로 맘먹으면 열심히 배운다. 배우는 목적도 다양하다. 유학, 취업 준비, 국제결혼, 한국 드라마 보기, 그저 한국어가 좋아서 등등. 좀 배우고 나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말들을 하는데, 참으로 인상적이고 우리말이 이렇게도 멋지게 타민족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데 대해 긍지도 느끼게 된다. 나머지 5%의 조선족도 열심히 배운다. 학력학교에서는 단기교육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세종한글학교 같은 비학력학교 덕분에 배울 길이 생겼다고 기뻐한다.
방치된 아이들
하지만 정작 조선족 학생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아무리 홍보를 하고, 조선족을 위한 주말 한국어교실을 만들어 봉사하겠다고 해도 배우려는 학생이 너무 적다. 조선족 식당, 회사 등을 전전하며 전단지를 수없이 뿌려도 함흥차사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조선족들 중에는 번연히 민족언어와 문자, 풍속습관도 모르는 부모 세대나 젊은 학생이 많은데 왜 민족언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지 나는 정말 고민이 많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았다. 아래 표에서 보듯 지난 15년 사이 중학교와 소학교 수가 현저히 줄었다. 학교 수뿐만 아니라 학생 수도 크게 줄었다. 그 이유로는 아이를 잘 낳지 않는 젊은 세대의 경향과 타지방으로의 이동, 주류 민족학교로의 이동 등이 꼽힌다. 특히 지린시조선중학으로의 집중화 현상이 심한데, 앞으로도 이 학교로만 학생이 몰리고 나머지 학교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주변에 조선족 학교가 없으니, 어린아이들은 지린시조선족실험소학교에 몰리고, 그마저 여의치 않은 아이들은 아예 민족소학교를 버리고 가까운 주류 학교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중학교도 자연스럽게 주류 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지린시조선족중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현재 700여 명이고 지린시조선족소학 재학생은 500여 명이지만, 지린시 내 여러 개 주류 민족학교에서 공부하는 조선족 학생은 2000명이 넘는다.
물론 주류 민족학교가 교육의 질이나 대학 진학률에서 월등하다. 그러나 6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린시조선족중학엔 교직원이 135명이 있다. 교원의 수준이나 교육에 대한 책임성은 그만하면 좋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다 한국이나 타 지방으로 가버려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 아이들은 조부모나 친인척에게 맡겨져 있고, 부모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다. 애들이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한창 사춘기인 아이들은 PC방에서 놀며 먹고 마시고 연애하는 데 바쁘다. 공부에는 빵점이다.
내가 잘 아는 아이 가운데 박 양이 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내와 사별한 뒤 한국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고, 80세 할머니가 박 양을 돌본다. 1, 2학년 때는 중상위 이상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고 남자애들과 가까워져 노래방을 다니기도 하면서 공부는 뒷전이 됐다. 3학년인 지금 박 양의 성적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모가 애써 번 돈으로 공부를 하는데 왜 노력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박 양은 태연하게 “공부 잘하면 뭐하냐. 아무 일이나 해서 돈 벌면 되는 거다”라고 한다. 친구들 중 너만 이러고 사느냐고 했더니 아니란다. 거의 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있고, 진짜 열심히 공부하는 애는 적다고 한다. 예쁘게 생긴 여자애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 탓에 공부를 잘해보고자 하는 학생들은 아예 조선족학교에 등을 돌린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조선족 학생의 한 달 용돈이 1500위안(약 27만 원)은 보통이고 많게는 5000위안(약 90만 원)을 쓰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무능하고 돈만 쓸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셈이다. 이는 코리안드림이 낳은 결과일까.
자식 세대가 자기 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포기한 것은 부모의 착오이고 부모 자신의 민족 관념이 얄팍한 탓이지, 다른 이유를 붙일 명분이 없다. 1세대, 2세대 조선족은 타민족과의 혼사를 금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당사자가 원한다면 타민족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조선족들은 거의 다 민족언어를 몰라도 된다고 여긴다. 부모 세대도 자식이 좋은 대학만 갈 수 있기를 바라지, 굳이 민족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조선족 역시 민족언어를 상실한 만족, 화족 등과 다를 바 없이 주류 민족에 동화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가 보전해야 할 보물 지금 중국에는 260여 개 대학이 한국어학과를 두고 있다. 이 학과 학생들은 대다수가 조선족이 아니다. 왜 주류 민족이 한국어를 열심히 배울까. 나는 베이화대 경영학과 3학년인 한족 학생 전 군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쓰촨성 사람으로 평소 조선족을 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와 조선족을 알게 됐고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한국 문화와 발전상을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그는 중국인의 한국어 실력이 중국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전 군은 언젠가 한국어 수요가 급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주류 민족은 다민족 문화를 향유해나가는데, 반면 조선족은 원래의 다민족 문화를 버리고 단일민족 문화를 택하는 퇴보의 길을 가고 있다. 자녀교육이 어찌 되든 말든, 민족언어가 있든 말든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 해외로 간답시고 다문화도 버리고, 농토도 버리고, 정든 고향도 버리고, 오늘도 그 어디에선가 노다지를 캐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럽다.
우리는 항상 조선민족(한국, 북한, 중국 조선족 포함)은 세상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조선민족이 조화롭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런 전대미문의 현실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민족은 각골난망하여 세상 사는 법칙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 세상을 열어야 한다.
나는 진실로 말하고 싶다. 중국 조선족은 큰 스케일을 갖고 다시 한 번 교육의 불을 거세게 지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풍속, 문화를 길이 보전해야 한다. 이는 선진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이 세상에 남겨야 할 귀한 보물이지 않은가.
(끝)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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